원주민 후예 차이잉원 vs 국민당군 아들 한궈위 '대만사 축소판'
대만 토박이 '본성인'과 장제스 따라 들어온 '외성인' 갈등사 상징
부호 집안 출신 엘리트 차이잉원, 서민 표방 한궈위 '극과 극'
(타이베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11일 치러질 대만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대만 토박이를 말하는 '본성인'(本省人)이다.
반면 국민당 후보인 한궈위(韓國瑜) 가오슝 시장은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의 아들이다.
대만에서는 국공내전 패배로 장제스(蔣介石·1887∼1975)가 대만으로 간 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부터 대만 섬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이들을 본성인,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넘어온 국민당 인사 등을 외성인으로 구분한다.
국민당의 오랜 독재 시절 소수인 외성인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본성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과거 대만에서는 한국의 지역감정만큼이나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국민당의 독재에 반대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민진당은 본성인들에게, 국민당은 외성인들의 지지를 강하게 받았다.
따라서 각각 본성인과 외성인의 후예인 차이 총통과 한 후보의 이번 대선 대결은 대만 현대 정치사에 있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지적도 있다.
또 차이 총통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사다. 정치인으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보다는 튀지 않고 신중한 성향이 강하다.
반면 패퇴한 국민당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한궈위는 서민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또 논리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대중 선동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두 후보의 성향은 극과 극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차이잉원…대만 독립 진영 '브레인' 출신
차이 총통은 1956년 타이베이의 부유한 기업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동차 수리업을 하던 부친 차이제성(蔡潔生)은 자동차 수리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후 부동산 투자로 영역을 넓혀 큰 부자가 됐다.
광둥성 출신 객가족인 차이 총통의 조부는 대만으로 이주했다. 차이 총통의 조모는 중국인들의 대만 이주가 본격화하기 훨씬 전부터 대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원주민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재능을 보인 차이 총통은 대만 최고 학부인 대만대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와 런던정경대에서 각각 법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립정치대학 등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뒤늦게 정·관계로 진출했다.
차이 총통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만 독립 추구 진영의 핵심 이론가 역할을 했다.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은 국민당이 배출한 총통이면서도 재임 말기에 중국 본토와 대만이 각각 별개의 나라라는 '양국론'(兩國論)을 들고나와 양안 관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바로 이 양국론 정립을 막후에서 주도해 만든 것이 바로 당시 리 후보의 고문이던 차이 총통이었다.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의 총통 당선으로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이 처음 정권을 잡고 나서 차이 총통은 양안 관계 전면에 나섰다.
양안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인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에 발탁되면서 민진당 정부의 양안 정책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
천수이볜의 부패 스캔들 속에서 민진당이 민심을 잃고 2008년 대선에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총통에 당선됐다.
민진당이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차이 총통은 당 주석을 맡아 당 재건에 앞장섰다.
2012년 대만의 첫 여성 총통 후보로 나섰지만 재선에 도전한 마잉주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2014년 치러진 지방선거를 큰 승리로 이끌면서 민진당의 재건 발판을 마련했고 2016년 총통에 당선돼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학자 출신인 차이 총통은 대중을 압도하는 연설 능력 등 카리스마는 부족한 편이다. 대신 인내심을 갖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 서민 표방하는 한궈위…대중 친화력 강해
한궈위 후보는 1957년 대만 신베이(新北)시에서 국민당군 장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허난성 출신인 그의 부친 한지화(韓濟華)는 교사를 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입대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서 장갑차부대 연대장까지 지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란 한궈위는 고교 졸업 후 대학 대신 군관학교로 진학해 6년간의 군 복무를 하고 전역했다.
한궈위는 당시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 수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자기 삶의 과정을 강조하면서 서민층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 시장은 1993년부터 2002년까지 3선에 걸쳐 입법의원(국회의원)을 지냈지만 이후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이후 대중적 인지도가 전무하다시피 하던 한 후보는 2018년 11월 대만 지방선거에서 혜성같이 등장한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타이베이 농산물도매공사 사장을 지낸 그는 2017년 민진당이 20년간 장악한 가오슝시에서 제2의 정치 인생 도전에 나섰다.
국민당 후보로는 승산이 없는 곳이었기에 한궈위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조직도 돈도 없던 한 후보는 서민층의 눈높이에 맞춘 소탈한 이미지를 앞세워 가오슝 시장 당선에 성공하면서 일약 중앙 정치 무대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정치적 강점은 쉬운 화법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능력이다.
지난 가오슝 시장 선거 때는 '떼돈을 버는 가오슝을 만들겠다'는 선거 구호를 앞세워 쇠락한 항구 도시인 가오슝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무책임하게 현실성이 없는 포퓰리즘적인 구호를 앞세우는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따라붙는다.
판스핑(范世平) 대만사범대 정치학연구소 교수는 "차이 총통과 한 시장은 서로의 배경이 매우 다르다"며 "개인 성향으로 봐도 차이 총통은 안정적인 스타일인 반면 한궈위는 개성이 강한 쪽"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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