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 전 회장 비판 '日 수사·사법제도' 민낯 드러나나
도쿄지검 특수부, 별건 수사로 4차례 걸쳐 체포 반복
월스트리트저널, 자백강요 등 비판·공정재판 의문 제기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본에서 비리 혐의로 체포돼 형사재판을 앞두고 있던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회장이 보석 상태에서 일본을 빠져나가면서 그가 비판해온 일본의 수사·사법 제도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되고 있다.
곤 전 회장은 지난달 31일 자가용 비행기 편으로 터키 이스탄불 공항을 거쳐 레바논에 도착한 뒤 미국 대리인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형사 사건에 관계된 일본의 제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성명에서 "나는 지금 레바논에 있다. 더 이상 유죄가 전제되고 차별이 만연하고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부정(不正)한 일본 사법 제도의 인질이 아니다"라며 일본 사법제도에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도망한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정치적 박해에서 벗어난 것'이라며 "마침내 미디어와 자유롭게 소통(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됐다.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일본 검찰과 재판부의 눈치를 보면서 대응을 자제했던 입장에서 벗어나 '불공정한 일본 법정'이 아닌 장외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무죄를 밝혀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장 곤 전 회장은 오는 8일 사실상의 망명지로 택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혔다.
르노·닛산·미쓰비시자동차 3사 연합체를 이끌던 곤 전 회장은 2011~2015년 유가 증권보고서에 5년간의 소득 50억엔(약 500억원)을 축소 신고한 혐의(금융상품거래법 위반)로 2018년 11월 19일 도쿄지검 특수부에 전격 체포될 때부터 억울함을 호소했다.
체포 후에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곤 전 회장은 르노와 닛산차의 경영통합 계획에 반발하는 사이카와 히로토(西川廣人) 사장을 주축으로 한 닛산차 일본인 경영진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검찰을 앞세워 내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불구속 수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보수 축소 액수가 늘어나고 특별배임 등 별건 혐의가 추가되면서 3차례의 재체포를 거쳐 구속 기소됐다.
곤 전 회장은 이후 방어권 보장을 위해 불구속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강조하면서 3차례의 보석을 청구한 끝에 지난해 3월 6일 체포 108일 만에 풀려났다.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지난해 4월 3일 트위터 계정을 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진실을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예고하는 것으로 일본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 후 그가 직면한 것은 재체포였다.
곤 전 회장은 기자회견 예고 이튿날인 지난해 4월 4일 별건의 특별배임 혐의로 4번째 체포돼 추가 기소됐고, 이후 보석을 다시 신청한 끝에 4월 25일에야 해외출국 금지 등 활동에 엄격한 제약 조건이 붙은 채로 다시 풀려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보석 과정에서 납부한 보증금은 총 15억엔(약 150억원)이었다.
이후 곤 전 회장은 침묵했다.
소셜서비스(SNS)를 이용해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가는 언제든 다시 체포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 결과적으로 볼 때 일본의 사법제도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공론의 장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겠다는 결심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곤 전 회장을 둘러싼 일본 검찰의 수사 행태를 놓고는 수사 초기부터 서방 언론을 중심으로 비판론이 일었다.
수사를 맡았던 도쿄지검 특수부는 곤 전 회장이 범죄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자 최장 23일로 제한된 구속 기간 내에 수사를 끝내지 못하고 별건 수사 형태로 구속 기간을 연장하는 무리수를 뒀다.
수사 대상을 소득축소 신고에서 배임 혐의 등으로 확대해 법원에서 별건의 영장을 받아 구속 기간을 늘리는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프랑스와 미국 등 서방 언론은 곤 전 회장이 '이상한 종교재판'으로 몰리고 있다면서 일본 검찰의 편법적인 수사 행태를 비판했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도 곤 전 회장의 1차 보석 결정이 나온 뒤 사설을 통해 곤 전 회장 사례를 장기구금 수사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이니치는 1차 보석을 결정한 법원이 곤 전 회장의 계속 구금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데는 장기구금에 대한 해외의 비판 여론이 작용했을 것이라며 체포, 구금 같은 인신 구속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 만큼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실제로 있는 경우로 제한해야 한다고 검찰의 수사 관행을 꼬집었다.
당시 아사히신문도 특수부 수사 사건에선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면 풀어주고 부인하면 구속이 길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이 때문에 혐의 인정을 압박하는 '인질사법'(人質司法)이란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곤 전 회장이 일본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후에도 서방 언론은 일본 사법 제도를 비판하고 곤 전 회장에게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달 31일 인터넷판에서 "곤 전 회장이 (일본) 법정에서 오명을 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며 일본 사법 제도를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곤 전 회장이) 뚜렷한 범죄 혐의가 없는 상황에서 몇 주에 걸쳐 구속당하고, 변호사 입회도 없이 조사를 받아야했다"면서 검찰에 의한 자백 강요와 보석 이후 외부와의 접촉 제한 등의 문제점도 거론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는 99% 이상의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로 볼 때 앞으로 곤 전 회장이 그간 수사를 받으면서 겪은 일들을 본격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하면 일본 검찰은 물론이고 법원까지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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