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2차대전 책임 묻는 푸틴…서방 외교관들 집단 반박

입력 2019-12-31 11:45
폴란드에 2차대전 책임 묻는 푸틴…서방 외교관들 집단 반박

미국·독일·이스라엘 "히틀러-스탈린 조약 탓 전쟁 발발"

러시아-폴란드, 과거사 놓고 갈등…"역사논쟁 아닌 정치드라마" 학계 지적도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폴란드에 일부 있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주장에 서방 외교관들이 집단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AP통신,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조젯 모스배커 폴란드 주재 미국 대사는 3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친애하는 푸틴 대통령님께.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 총통)와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기로 공모한 것은 사실입니다. 폴란드는 그 끔찍한 전쟁의 희생국입니다"라고 적었다.

이에 폴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대사님께, 진정으로 외교를 아는 것 이상으로 역사를 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응수했다.

이 같은 설전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24일 러시아 국방부 회의에서 꺼낸 발언 때문에 빚어졌다.

푸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히틀러와 서방이 공모해 2차 세계대전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폴란드는 유럽 내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에 찬동한 반유대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유럽의회가 2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데 나치와 함께 소련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의하자 심기가 크게 불편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일 선전포고로 촉발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독일과 소련이 그들 사이에 있는 폴란드와 발탁국가들을 분할 점령하기로 약속했다는 점, 독일이 침공한 지 2주 뒤 소련이 침공했다는 사실에 따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롤프 니켈 주폴란드 독일 대사, 알렉산더 벤 츠비 주폴란드 이스라엘 대사도 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소련의 조약 때문에 발발했다고 지적했다.



폴란드는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총리가 나서 4페이지에 달하는 비판 성명을 내는 등 반발하고 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지난 29일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저지른 정치실패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고의로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스탈린이 폴란드를 분할하려고 공모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천연자원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의 범죄 기구가 유럽을 점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폴란드의 역사학자 마리우스 월로스는 "푸틴의 말은 폴란드, 미국, 전 세계 유대인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라며 푸틴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영국 역사학자 로저 무어하우스는 푸틴 대통령의 말 때문에 나치와 소련의 조약이 지닌 범죄 속성과 중요성을 대중이 더 잘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영국 카디프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세르게이 라드첸코는 푸틴 대통령의 말은 전체를 아우르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미심쩍지만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나치와 소련에 똑같이 지우는 유럽의회의 결의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라드첸코 교수는 "역사는 복잡한 문제라서 전문 역사학자에게 맡길 때 제일 좋다"며 "최근 몇 달 동안 우리가 지켜본 것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 드라마"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폴란드가 소련이 공산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서방에 가까워지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폴란드는 안보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서유럽 중심의 정치·경제 공동체인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서방의 일원이다.

올해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발발 8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푸틴 대통령을 초대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해방을 기념하는 오는 1월 27일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싸운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기념일로 정해 매년 크렘린궁 앞 붉은 광장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등 성대한 축제를 벌이고 있다.

jangj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