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은 바로 당신"…칠레 여성들의 '성난 외침' 전 세계로
여성 폭력에 항의하는 노래와 율동, 산티아고서 시작돼 각국 확산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성 수천 명이 지난 4일(현지시간) 칠레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에 모였다.
10대부터 백발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줄 맞춰 서서 똑같은 율동과 함께 노래를 맞춰 부르기 시작한다.
"성폭행범은 바로 당신"이라는 후렴구에서 여성들은 일제히 손을 뻗어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최근 칠레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의 퍼포먼스다.
이 퍼포먼스가 처음 시작된 곳은 칠레다.
AFP통신에 따르면 칠레 발파라이소의 여성단체 '라스 테시스'가 만연한 여성 폭력과 이를 방치하고 방조하는 정부 등에 항의하는 뜻에서 노래와 율동을 만들었다.
율동은 따라 하기 쉽게 간단하고, 노래엔 멜로디가 거의 없다.
"가부장제는 날 때부터 우리를 심판하는 재판관"이라는 가사로 시작해 여성 살해와 실종, 성폭력, 그리고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꼬집는다.
노래는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잘못이 아니야. 성폭행범은 바로 당신"이라고 힘줘 말한다. 이어지는 가사 속 '당신'은 경찰, 판사, 국가, 대통령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된 이날 퍼포먼스에 참여한 49세 마그달레나 콘트레라스는 EFE통신에 "나도 내 동생도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했다. 오늘 난 동생을 위해, 내 딸과 어머니, 모든 여성을 위해 나왔다"며 "이제 여성들의 힘이 세졌기 때문에 더는 짓밟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불평등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50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칠레에선 시위 과정에서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호소도 잇따랐다.
칠레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경찰 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4건, 부적절한 접촉이나 탈의 명령 등에 대한 신고가 75건 접수됐다.
분노한 칠레 여성들의 외침은 국경을 넘어 공감을 샀다.
국제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이었던 지난달 25일 칠레 여성들이 대통령궁 앞에서 벌인 퍼포먼스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면서 각국에서 동조 시위가 이어졌다.
멕시코와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을 물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서도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노래와 율동을 함께 했다.
산티아고에서 아기를 안고 어머니와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한 발렌티나 훌리아는 이 노래 가사가 "칠레에서 전 세계로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말했다고 EFE통신은 전했다.
mihy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