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시위 한달] 40년 만에 새로 쓰는 헌법…어떻게 바꿀까
시위대 요구 따라 '피노체트 헌법' 폐기와 새 헌법 제정 물꼬 트여
"새 헌법으로 교육·의료보험·연금 개선되길"
(산티아고=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칠레에서 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시위가 끌어낸 변화 중 지금까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새 헌법 제정의 물꼬를 튼 것이다.
칠레 정치권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새 헌법 제정 여부와 초안 작성 주체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내년 4월에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새 헌법 제정은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돼 지난달 18일 시작된 칠레 시위에서 자주 등장했던 요구 사항 중 하나였다.
현재 칠레 헌법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1973∼1990년) 시절인 1980년 제정됐다.
1925년 제정된 구 헌법을 대신한 '피노체트 헌법'은 이후 수차례 개정됐다.
민주화 회복 후 대통령에게 하원 해산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나 대통령의 연금 가능 조항 등이 후에 없어지거나 수정됐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뼈대가 유지됐다.
피노체트 헌법은 국민의 의료와 교육 등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책임이나 국민의 참정권 등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계속 나왔다.
칠레 APEC 취소한 이유는?…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에 국민 분노 / 연합뉴스 (Yonhapnews)
칠레에 만연한 불평등과 부조리 등에 분노한 시위대는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낡은 헌법을 폐기하고, 칠레 사회와 경제를 완전히 뒤바꿀 새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칠레 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다수도 새 헌법을 원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시위대의 거센 요구에 새 헌법 제정을 수용하고도 처음엔 의회에 초안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한 발 더 물러나 시민 참여 가능성이 열린 제헌의회 구성 가능성도 수용했다.
내년 국민투표에서 새 헌법 제정이 결정된다고 해도 제헌의회가 구성돼 초안이 작성되고, 최종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기까지는 많은 절차와 시간이 남아 있다. 현행 헌법이 칠레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믿고 새 헌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새 헌법에 담길 내용에 대한 논의가 벌써 시작됐다.
클라우디아 에이스 칠레대 교수는 CNN칠레에 "현재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는 내용이 새 헌법에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시위 현장에서 만난 이들이 새 헌법을 통해 바꾸고 싶은 것은 교육, 의료보험, 연금으로 압축됐다.
민간에 맡겨진 이러한 기능들을 국가가 더 많이 책임지도록 헌법이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경시된 인권 역시 새 헌법을 통해 강화해야 한다고 시위대는 말한다.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 카밀라는 "마푸체 원주민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인권이 헌법에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헌법 제정까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만큼 시위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헌법 제정과 관련한 합의가 이뤄진 후 시위 중심지인 산티아고 도심 이탈리아 광장엔 '평화'라고 적힌 대형 하얀 천이 깔렸다.
그러나 평화는 아직 어림도 없다는 듯 그 천은 곧 치워졌고, 어김없이 다시 시위가 열렸다.
일부 시위대는 이번 합의까지의 시위가 '시즌 1'이었다면 이제부터 '시즌 2'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시민의 요구가 담긴 헌법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칠레 사회를 변화시킬 때까지 시위대는 멈추지 않겠다고 힘줘 말한다.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난 마우리시오는 "정치권의 합의가 큰 진전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의회 절차 등 복잡한 부분이 많아 계속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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