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반정부 시위 한달 레바논…"홍콩 못지않게 싸우겠다"

입력 2019-11-16 07:00
[르포] 반정부 시위 한달 레바논…"홍콩 못지않게 싸우겠다"

도심에 팽팽한 긴장감…쇼윈도엔 '대통령 체포' 적힌 티셔츠도

기득권 정치인들에 불신감 커…시민 "기술관료로 새 정부 꾸려야"

(베이루트=연합뉴스) 노재현 특파원 =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아랍 이슬람권에서 보기 드물게 개방적인 분위기와 문화의 다양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15일(현지시간) 오전 11시께 찾은 베이루트 도심은 화려한 옷을 입은 인파가 거리를 누비고 유명 커피숍이 붐비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전날까지 일부 반정부 시위대가 타이어를 불태우면서 차단됐던 베이루트 주변 고속도로도 통행이 많이 재개됐다.

그러나 베이루트 곳곳에서 지난 한달간 이어진 반정부 시위의 흔적을 볼 때마다 팽팽한 긴장이 여전했다.

베이루트 중심가의 아민 모스크(이슬람사원) 옆 넓은 공터와 도로에는 시민들이 반정부 농성에서 쓴 천막 수십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뚝 솟은 팔 모양의 조형물에는 '혁명'을 뜻하는 아랍어가 눈에 띄었다.

아민 모스크 주변은 이번 시위 초기 수십만명이 운집해 정부 타도를 외쳤던 장소다.



시위대 수십명은 오랫동안 텐트에서 생활하며 반정부 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 텐트에서 만난 그래픽디자이너 하디 에제딘(34) 씨는 자신이 24일 동안 텐트에서 지내고 있다며 "경제도 추락하고 공공서비스도 망가졌다. 지금 정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머물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는 "홍콩은 시위가 4개월 됐는데 우리는 한 달밖에 안 됐다. 계속 싸우겠다"라고도 말했다.

바로 옆 텐트에 있던 카림 말라드(22) 씨 역시 지칠 법한 노숙 생활에도 끄떡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라드 씨는 "내가 텐트에서 시위하는 이유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를 통해 이 나라가 완전히 바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좋은 정부, 시민을 위한 정부"라고 말했다.

종파별 안배에 따른 권력 배분보다는 유능한 기술관료가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스크 옆 건물 통로에서는 젊은이 10여명이 둥글게 앉아 기타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대중가요를 웃으며 부르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지난 한달간 학교 대신 거리에 나왔다.

베이루트 내 대학교 대부분 반정부 시위에 연대한다는 뜻에서 열지 않고 있다.

한 한국 교민은 "베이루트에서 현재 수업을 하는 대학교는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AUB) 등 2곳에 불과하다"라고 전했다.

레바논에서는 지난달 17일 왓츠앱 등 메신저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의 세금 계획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막대한 국가부채와 높은 실업률, 통화가치 하락 등 경제난과 기득권 정치 세력에 대한 불신이 누적된 결과다.

시위가 한 달이나 지속하면서 시민들은 매일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으로 광장이나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이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런 저항 열기는 쇼핑 거리에서도 느껴졌다.

아민 모스크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한 옷가게에는 '대통령을 체포하라'(ARREST THE PRESIDENT)라는 문구가 적힌 반소매 티셔츠가 유리 너머에 진열돼 있었다.

기득권 정치인으로 퇴진 압박을 여전히 받는 미셸 아운 대통령을 겨냥한 표현이다.

아운 대통령은 최근 내각에 정치인과 기술관료를 섞어야 한다고 강조해 '100% 기술관료'를 주장하는 시위대의 반발을 사고 있다.



홍콩, 이라크 등의 반정부 시위와 달리 평화롭게 진행되던 베이루트는 최근 유혈사태로 긴장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다.

지난 12일 베이루트 남부의 칼데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한 진보사회당의 지방 간부 한 명이 시위대의 도로봉쇄를 뚫으려던 군인의 총격으로 숨졌다.

시위대와 군인의 직접적인 충돌로 인한 첫 사망자라는 점에서 레바논 정국이 예측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일부 시민은 15일 베이루트의 한 경찰서를 항의 방문하고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줄 것을 촉구했다.

다만 이날 베이루트에서는 궂은 날씨 탓에 대규모 시위가 열리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이날 오후 3시 베이루트 북쪽의 자이투나 만(灣)에서 신임 총리 내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행사 30분 전부터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까지 계속 치자 시민들은 발길을 돌렸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전날 이슬람 수니파를 대표하는 사드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시아파를 대변하는 헤즈볼라와 그 동맹인 아말이 회의를 거쳐 모하메드 사파디 전 재무장관을 새 총리로 지명하는 데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베이루트의 한 시민은 "새 총리로 지명됐다는 사파디 전 장관은 부패한 기득권 정치인"이라며 "날씨가 좋아지면 반대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신에 따르면 베이루트와 달리 이날 레바논 북부의 중심도시 트리폴리에서는 시민 수천 명이 모여 사파디 전 장관의 신임 총리 지명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noj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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