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23)前동독총리 "동독 악마화가 문제…심리장벽의 원인"
1989년 北방문…"김일성, 베트남식 통일 어렵고 평화통일 언급"
"극우정당, 선동 탁월…기성정당 퇴조원인 분석해야"
"한반도서 미국이 적극 역할해야 남북 관계도 진전"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8번째 마지막 시리즈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의 과정과 극우 부상 등 통일 후유증에 대해 5일간 5개의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20) '웬 교류·통일?'…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장벽에 묻는다
(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로 돌아가 해법찾기
(22) "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23) 前동독총리 "동독 악마화가 문제…심리장벽의 원인" ←←
(24)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인터뷰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는 독일 통일에 대해 항상 아쉬워하는 이야기를 한다.
91세이지만 여전히 독일 좌파당의 원로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계속 독일 사회에 전달되고 있다.
통일 6개월 전까지 4개월 남짓 짧은 동독 총리직을 수행했다. 집권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온건파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총리를 맡게 됐다.
당시 통일보다는 동독의 체제변화를 먼저 꾀했으나, 동독의 첫 자유선거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이런 탓인지 통일 후유증이 거론될 때마다 그는 통일이 천천히 이뤄졌다면 부작용이 덜했을 거라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베를린 로자룩셈부르크 거리의 좌파당사에서 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독의 붕괴와 통일은 혁명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과정이었다"라며 동독이 자체적으로 민주사회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통일 이후 동독 공산주의 세력이 주축이 된 좌파당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활약했다.
모드로 전 총리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독일 좌파 성향을 보인다.
그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성이 있다. 독일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대북 문제에서다. 그는 매년 주독 북한대사관의 주요 행사에 초청을 받는다. 지난해에도 북한을 방문해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났다. 우리나라에도 여러번 방문했다. 남북한 모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는 1989년에도 북한을 찾아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김 주석은 베트남식 통일은 안된다며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고 기억을 전했다.
모드로 전 총리와의 인터뷰는 한반도와 연관된 독일 통일에 대한 당시 교훈뿐만 아니라 통일의 후유증의 하나로 지목되는 옛 동독지역에서의 이민자에 대한 혐오 및 극우 부상 문제를 듣기 위한 목적도 컸다.
모드로 전 총리는 옛 동독지역 시민들이 갖는 '마음의 장벽'을 해체하기는 현재 어렵다고 했다. 독일 통일 후 집권세력이 지나치게 "동독을 악마화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통일 독일에 형성된 공통의 '기억문화' 속에서 옛 동독지역 시민들이 자괴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급부상하는 극우 정당에 대해 "파시스트들은 3문장 정도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이야기하는 데 탁월하다"면서 기성정당의 분발을 촉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이다. 독일이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통일 후 유럽의 최대 경제대국 자리로 다시 올라섰다. 통일에 대한 결과적인 평가를 해본다면.
▲ 동독의 붕괴와 통일은 혁명이 아니다. 동독에 이식된 소련식 시스템이 내적으로 폭발해 실효성이 없어진 것이 확인된 과정이다. 혁명의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과정이 진행됐던 것이다. 전환과정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통일 후 29년간 동독과 서독 시민 간에 누리는 권리에 차이가 있었다. 경제적 격차도 중요하지만 사회, 정치적인 문화와 결부돼 결과적으로 큰 갈등이 야기되고 있다.
노조도 전반적인 임금 상승을 목표로 할 뿐이지 옛 동서독 지역 간 임금격차에 대해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 옛 동독지역 출신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진입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는데.
▲ 대학 총장 중 동독지역 인사가 한 명도 없다. 정교수 가운데서도 동독지역 출신은 5% 정도밖에 안 된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3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대학에서 자리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자산의 격차가 줄어들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았다. 내 딸 경우도 그렇다. 동독 시절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동독에서는 저항적 학문인 교회사를 논문에서 다뤘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의 학자들에 대한 재평가 회의에서 동독 총리를 지낸 내 딸이라는 이유로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모여 '1등 시민'이 있고 '2등 시민'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셈이다. 정치 분야도 마찬가지다. 동독지역의 주 정부, 주 총리 등 고위직 60%가 서독지역 출신이다. 동독지역 장년층들이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은 자라나는 세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 현실적으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까.
▲ 현재로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두 가지로 이유를 설명하겠다. 첫째는 '기억문화'의 문제다. 연방정부는 동서독 간의 공통의 '기억 문화'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독을 지나치게 악마화해왔다. 옛 동독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유대인의 시체로 산을 만든 나치의 전쟁 범죄와 같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를 도와 신동방정책을 추진한 에곤 바는 "우리 세대는 수많은 질곡과 역사적 변화를 경험한 세대다. 비밀경찰 슈타지가 남긴 문서를 나치의 행위와 비교하는 것은 문서가 가진 문제점의 정도를 감안하면, 독일 사회 전체에 더 큰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억문화가 중요하다. 어느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봉사하는 기억문화는 정치도구화된 것이다. 기억문화는 역사적 과오와 성취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통해 성찰할 수 있다.
-- 올해 튀링겐주를 제외하고 동독지역 선거에서 좌파당이 상당히 부진했고 극우 성향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좌파당 자리를 차지했다. 동독지역의 좌파의 맥을 잇는 좌파당에 대해 유권자들은 계속 힘을 실어줬는데, 상황이 갑자기 어렵게 됐다. 유권자들의 마음이 왜 바뀌고 있는가.
▲ 요인을 세 가지로 설명하겠다. 현재 독일이 군사적 안보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불안정서가 만들어져있다. 미국은 끊임없이 국방비 증액을 압박한다. 유럽연합(EU) 차기 집행위원장 내정자인 우르줄라 폰 데어라이엔 전 국방장관과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현 국방장관은 군비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이렇게 독일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불안 정서를 AfD가 적극적으로 자극해 선동해내고 있다. 기성정당이 AfD를 키운 셈이다.
두 번째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다"고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경찰력과 교사, 학교, 주택을 더 확보하는 게 필요했는데 이에 대한 정책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선의로 난민 수용을 지지했던 대중이 불만을 쌓아가게 된 것이다. 이를 AfD가 포착해 비집고 들어왔다.
세 번째는 정치 환경 문제다. 현재 의회에서 주요 정당이 7개로 늘어났는데, 일부 지역에서 좌파당이 여러 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다 보니 각 당의 색채가 발현되지 못한다. 애초 정책 목표를 책임 있게 관철을 시키지 못하다 보니 유권자들이 불만을 느끼게 된 것이다. 기성정당은 합리적인 용어로 대중을 설득하려 하지만, AfD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어조로 설득하려 한다. 기성정치권에 답답해하던 사람들의 속이 시원하게 뚫린 것이다. AfD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 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던 당시도 그랬다. 기성정당이 유권자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할 때 이를 포착한 나치가 불만을 끌어안았다. '위대한 국가'라며 국가를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상징정치를 했고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좌파당은 옛 동독시절과 통일 이후 비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젊은 세대가 동의할 수 있는 비전을 주지 못하고 있다. 기성정당 다 마찬가지다. 왜 외면을 받게 되는가에 대한 분석부터 안이했다.
-- 기성정치권은 AfD를 연정 대상자에서 제외하고 정치적으로 계속 무시하고 있다. 계속 가능하다고 보는가.
▲ 언젠가 고삐가 풀릴 수 있다. 기성정당이 연정을 구성하지 못하게 됐을 경우, 기성정당이 "우리는 지역이나 국가를 다스리는 책임을 다하고 싶고, 이게 애국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극우당과 연정을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경계해야 한다.
-- 북한과는 가까운 사이로 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주독 북한대사관의 주요 행사에도 초청을 받는다. 2017년에는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으로부터 북한의 외교정책에 도움을 달라는 서신을 받은 것으로 안다.
▲ 1984년부터 북한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를 해왔다. 당시 김일성 주석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드레스덴에서 3일간 휴식을 취했는데 식사도 같이하고 엘베강에서 증기선도 같이 탔다. 내가 사회주의통일당의 드레스덴 1등 비서로 있을 때였다. 이후 김 주석이 감사의 표시로 1989년에 북한으로 국빈 초청을 해줬다. 북한에서 3시간 동안 오찬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때 김 주석이 3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통일정책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베트남식 통일은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경제 재건 정책에서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김 주석은 북한이 소련에 덜 구속받으면서 남측과 공통점을 찾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했다.
-- 작년에도 북한을 방문해 리수용 부위원장과 만난 것으로 안다.
▲ 당시 북한 당국자들은 "우리 민족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 남북 간의 관계 개선도 더 이룰 수 있다.
-- 통일 후 동독 재건 비용으로 걷게 된 통일연대세가 2021년부터 사실상 국민의 90%가 면제를 받는다. 아직 동서 간의 경제적 격차 문제가 남아있는데.
▲ 통일연대세의 사실상 폐지는 큰 오류다. 통일연대세의 폐지 반대는 좌파당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슈를 AfD가 지금 가져가 기막히게 활용하고 있다. 좌파당은 통일연대세를 반대한다며 거리에서 3시간 동안 연설을 하며 설득하려 한다. 그런데 AfD는 3문장 정도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이야기하는 데 탁월하다. 파시스트들의 강점이자 해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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