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 돌아가 해법찾기
옛 동독지역서 극우당 AfD, 청년세대서도 인기…분단기 연구 활발
경제 넘은 정체성 문제 속 극우 부상…"극우당 지지층, 공감능력 낮고 권위적"
'동독 민주화 주인공이라는 자긍심 찾기' 시도로 공통의 '기억문화' 형성
"독재사회의 민주사회 전환서 시민사회 역량 축적에 시간 걸려"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8번째 마지막 시리즈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의 과정과 극우 부상 등 통일 후유증에 대해 4일간 5개의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20) '웬 교류·통일?'…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장벽에 묻는다
(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로 돌아가 해법찾기 ←←
(22) 롤란트 얀 슈타지문서기록소장 인터뷰
(23)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 인터뷰
(24)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인터뷰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을 닷새 앞둔 지난 4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옛 동독지역인 츠비카우의 극우테러 희생자 추모관을 찾았다. 신(新)나치 조직인 국가사회주의지하당(NSU)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곳이었다.
같은 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독일 서부의 헤르마린겐을 방문해 1939년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 시도를 한 시민 게오르크 엘저의 추모관에서 고개를 숙였다.
독일 사회는 통일의 문을 연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신나치를 포함한 극우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다.
극우 성향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약진하고 극우 테러가 현실화된 탓이 크다.
옛 서독지역에 비해 극우세력의 팽창이 두드러지는 옛 동독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원인과 해답을 찾고 있다.
통일 이후 옛 동독지역 시민들 사이에 오래된 자조 섞인 푸념인 '2등 시민'이라는 말을 최근 들어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2등 시민'이라는 말은 통일 과정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이후에도 소외됐다는 불만에서 비롯됐다.
정치권에서도 기성 대형 정당들이 옛 동독지역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실망감은 극우 성향 정당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2등 시민' 정서와 반(反)이민자 정서 및 극우세력 부상 문제를 경제적·사회적 격차로 인한 박탈감의 문제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진단만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반성 속에서 최근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옛 동독 시민들의 반이민자 정서를 계도하려는 기존 관점을 반성하면서 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뒤늦게나마 관측된다.
통일을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옛 동독 시민이 스스로 민주화를 이뤄내고 통일 이후 사회의 주역 중 하나라는 자긍심에 이제야 주류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통해 현 시대를 살아가는 독일 시민이 모두 이에 대한 공통의 '기억문화'를 형성해 나갈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동독 내 저항세력 출신으로 연방정부 차관급인 롤란트 얀 슈타지 문서관리소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며 "작은 요인들이 모여 큰 결과를 만들어 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3일 '통일의 날' 기념식에서 "통일은 진행 과정으로 완수는 끊임없는 임무"라고 언급했듯이, 독일에서는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사회 통합 및 민주적 시민사회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통일이 된 지 29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서독 간 지역 격차 및 차별, 반난민 정서 및 극우세력의 부상, 혐오 문제 등 독일 사회가 직면한 도전 과제들이 우리에게 무관한 사안들이 아닐 수 있다.
우리 내부에서든, 남북 간이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통의 '기억문화'를 형성하고, 이민자 차별 등 타자에 대한 혐오 문제를 직시해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 사회가 분단기, 통일 과정, 그 이후의 기억을 소환해가며 해답을 찾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한반도의 현실이 동서독 분단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현재의 문제점들을 풀어가려는 독일의 움직임만큼 좋은 레퍼런스를 찾기도 쉽지 않다.
◇ 좁혀졌지만 여전한 동서독 경제력 격차
독일 정부가 매년 발간하는 '독일 통일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옛 동독지역의 경제력은 지난해 서독지역의 75%까지 올라왔다.
통일 당시인 1990년에 동독지역의 경제력은 서독지역의 43% 수준이었다.
옛 동독지역 경제는 통일 직후 몇 년간 급격히 성장했다가 1994년께부터 완만하면서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 옛 서독지역 국내총생산(GDP)은 1.4% 상승했는데, 옛 동독지역은 이보다 높은 1.6%였다.
옛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2005년 18.7%에 달했는데, 지난 8월에 12.0% 포인트나 줄었다. 같은 기간 옛 서독지역에서는 5.0% 포인트 감소했다.
이제 옛 동독지역의 경제력은 유럽연합(EU)의 평균 수준이다. 공산주의를 경험한 동유럽 국가들보다 확연히 앞선다.
지난해 동독지역의 평균임금은 서독지역의 84% 수준으로 나타났다. 전년에는 81%였다.
동서 간의 현재 경제력 격차는 보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여전히 격차가 있다고 볼 수도 있고, 많이 좁혀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인구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통일 직후만 해도 기존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대량실업 사태를 겪은 옛 동독지역에서 젊은이들이 대거 일자리를 찾아 서독지역으로 넘어갔다.
이후에도 인구 유출 현상이 계속됐다. 그러나 2017년 이후 동독지역으로의 유입인구가 서독지역보다 많다.
동독지역의 출산율이 높은 데다, 중소기업의 성장률이 평균 이상이라는 점도 긍정적인 측면이다.
여전히 동서 간의 경제력 격차는 있지만, 격차가 줄어든 가운데 옛 동독지역에서 극우세력이 늘어나고 소외감이 커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 옛 동독지역서 57% '2등시민'이라 느껴…4년전보다 통일 평가 악화
최근 주간지 포쿠스가 여론조사기관 엠니드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독일인 전체의 57%가 독일 통일이 완성됐다고 응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37%였다.
옛 동독지역 시민의 의견이 뚜렷이 구분되는데, 응답자의 50%가 통일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성공적이었다는 의견은 47%였다.
통일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정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동독지역 시민 가운데 57%가 '2등 시민'으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4년 전과 비교해 악화한 것이다.
2015년 인프라테스트가 실시한 조사에서 통일이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답변은 전체적으로 73%에 달했다.
옛 동독지역에서도 66%였다. 다른 여론조사기관의 결과이지만, 4년 만에 통일에 대한 결과적인 평가가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 대량 난민 유입 후 발현된 극우·혐오 정서
동서 간 경제적 지표가 개선되는 상황에서도 옛 동독지역에서 소외 정서가 커지고 통일에 대한 평가가 나빠지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2015년 유럽의 '난민위기'를 기점으로 보고 있다.
독일이 시리아 등 중동지역에서 탈출한 10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옛 동독지역의 반난민 정서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감 역시 극우세력이 자극해 키웠다는 지적도 일반적이다.
애초 독일에 반이민자 정서와 극우적 정서가 상당히 잠재되어 왔는데, 표면적으로 나치와 거리를 두는 극우 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부상하면서, 공개적으로 표출됐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옛 동독지역인 튀링겐주(州) 선거에서 AfD가 2위를 차지한 데 대해 사회학자 알렉산더 옌델은 주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AfD의 성공이 이 지역의 낮은 소득과 높은 실업률과는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장 큰 원인은 이 지역 사회의 외국인과 무슬림에 대한 혐오주의적 태도라고 지적했다.
또, AfD 지지층의 경제적 사정은 괜찮지만, 이민자의 등장으로 위협당하고 상황이 변할 수 있다며 마치 희생자인 듯한 감정상태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옌델은 AfD의 지지층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낮고 권위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라이프치히대 연구팀은 권위주의적 성향이 정치적 극우 성향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인종차별의 기본적인 태도는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권위주의·전체주의적 정부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연구였다.
연구에서는 2천4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0%가 권위주의적 시스템을 옹호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더구나, 옛 동독지역에서는 청년층의 극우화가 사회문제시 되고 있다.
올해 튀링겐주뿐만 아니라 옛 동독지역인 작센주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20대 투표 결과 AfD가 1위를 차지했다.
옛 서독지역과 달리 젊은 연령대에서 극우 성향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직 이에 대한 원인 분석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 상황이다.
◇ 옛 동독지역에 대한 연구 가속…'2등시민' 감정 원인분석
독일 통일 29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달 2일, 작센주의 주요 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는 동독의 반체제 운동을 돌아보는 전시 및 토론회가 열렸다.
라이프치히는 1989년 월요시위를 통해 동독 내 민주화 운동의 확산을 끌어낸 도시다. 이 도시의 성 니콜라이 교회는 시위가 열렸던 대표적인 장소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과 저항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에서는 동독 주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대표성을 제고하면서 시민사회를 성숙시키는 방안에 대해 토론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진 박사는 "동독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분단의 피해자이자 통일의 수혜자로만 묘사하던 주류 사회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동독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담아낼 기억의 공간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행사뿐만 아니라 최근 독일에서는 옛 동독지역의 극우 부상 현상과 관련해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급격히 많아지고 있다. 역시 연구의 출발은 분단기와 통일 과정 등이다.
독일 정부도 옛 동독지역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망령이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 탓인지 독일 사회의 대응은 빨라지는 분위기다.
최근 옛 동독지역 할레에서 극우주의자에 의해 벌어진 유대교 회당 총격 테러 사건과 지역 정치인 살해 사건은 독일 사회의 경각심을 한층 일깨웠다.
그러나 여전히 진단과 처방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공통의 '기억의 문화'를 만들어 사회통합을 이루고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다져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에서 구체제 주요 인사들이 축출된 후 총리를 지낸 한스 모드로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 후 집권세력이 '동독의 기억'을 잘못 형성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억문화는 역사적인 과오와 성취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해야 하는데, 통일 이후 동독에 대한 문제점이 정치 도구화돼 나치와 동독체제를 동일시했다"면서 "동독이 지나치게 악마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옛 동독지역에서 반난민 정서가 강하고 극우세력이 부상하는 것은 아직 이 지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경험이 적고 민주적 시민사회가 옛 서독에 비해 늦게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얀 슈타지문서기록소장은 "옛 동독 주민들 모두가 역동적인 시민사회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다"라면서 "독재사회가 민주사회로 바뀐 뒤 시민사회의 역량이 축적되는 과정은 하루 이틀 만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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