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외출 30분 만에 눈물 주르륵…숨쉬기 어려운 '가스실' 뉴델리
인디아게이트 등 주요 건물, 스모그로 형체 알아보기 어려워
쓰레기 소각·차량 매연·폭죽 등 원인…"인도인, 환경보호 의식 낮아"
(뉴델리=연합뉴스) 김영현 특파원 = 휴교령이 내린 4일 뉴델리의 아침은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 대신 자욱한 스모그만 가득했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가 무채색의 도시가 됐다. 컬러 사진에 회색 물감을 들이부은 듯, 도시는 온통 희뿌연 색이었다. 시내 어디를 가나 메케한 냄새도 진동했다.
국회의사당 등 인도의 주요 관공서가 밀집한 시내 라즈파트 거리에 섰다.
평소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던 높이 42m의 뉴델리의 상징물 인디아 게이트는 짙은 스모그 탓에 윤곽이 흐렸다. 인디아 게이트 뒤 멀찍이 떨어진 건물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핵전쟁 이후 모습을 그린 공상과학(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이날 이곳 초미세먼지(PM 2.5, 지름 2.5㎛ 이하) 농도는 669㎍/㎥.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일평균 PM 2.5 농도의 안전 기준 25㎍/㎥보다 25배 이상 높은 수치다.
그나마 전날보다 상황이 나아진 게 이 정도였다.
전날 오전 뉴델리 시내 곳곳의 초미세먼지 농도는 1천㎍/㎥을 넘나들었다. 공기 질 지수(미국 AQI 기준)가 1천700∼1천800선을 넘는 곳도 속출했다.
짙은 스모그 때문에 뉴델리 인디라간디국제공항에 내려앉지 못한 비행기 37대가 인근 공항으로 방향을 돌리는 등 회항과 결항도 속출했다.
아르빈드 케지리왈 델리 주(정식 명칭은 국가수도지구) 주총리가 "델리가 가스실로 변했다"고 탄식할만한 상황이었다.
남부 뉴델리에서 만난 전기기사 아미트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여주며 "외출한 지 30분 만에 이렇게 됐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눈과 목이 따갑고 피부가 가려워서 매우 괴롭다"고 말했다.
공기 질 상황이 이 지경이지만 마스크를 착용한 인도인의 모습은 드물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델리대 재학생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인도인의 의식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많은 인도인은 아직 환경 오염 같은 이슈를 소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이 때문에 환경 문제를 대하는 인도인의 태도가 매우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이의 건강은 나 몰라라 한 채 눈앞 자신의 이익을 좇는 데만 열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오전 빈민가와 시내 거리 곳곳에서는 쓰레기와 나무 등을 태워 요리하거나 몸을 녹이는 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뉴델리 주변의 초대형 쓰레기 매립지에서도 1년 내내 불길이 끊이지 않는다. 쓰레기를 태운 뒤 고철을 찾아내 팔려는 빈민들이 당국의 단속을 피해 계속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 일당이 한화 1만원도 되지 않는 저소득층에게는 이 같은 '방화'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 무조건 그들을 탓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마스크도 일종의 사치품인 셈이다.
이와는 별도로 겨울 문턱인 이맘때면 뉴델리 인근에서 더 큰 방화가 발생한다. 뉴델리 주변 하리아나주, 펀자브주 등에서는 농부들이 추수가 끝나면 농작물 쓰레기가 쌓인 논밭을 마구 태운다.
이런 현상은 11월 중순 시작되는 다른 작물 파종기까지 무려 수천 곳의 경작지에서 빚어진다.
당국도 단속을 벌이지만 농작물 쓰레기를 처리할 비용과 시간이 없는 농부들은 끈질기게 소각을 이어간다.
남한보다 면적이 넓은 뉴델리 인근 주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고스란히 뉴델리 등 북인도 상공으로 퍼져간다.
뉴델리는 내륙 분지 지형인 데다 이때는 계절풍도 불지 않는다. 상공에 정체된 오염물질이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 이유다.
여기에 낡은 경유차가 뿜어내는 매연, 건설공사 먼지, 석탄 화력 발전소 매연, 힌두교 디왈리 축제 시즌에 터지는 폭죽 등이 더해지면서 뉴델리의 겨울 대기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정부는 대기오염 상황이 심각해지자 휴교령과 함께 차량 운행 홀짝제, 건설 공사 일시 중단 등의 조치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에도 불구하고 뉴델리 시내 곳곳의 건설 현장에서는 보란 듯 공사가 계속됐다.
정부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영'이 서지 않는 상황인 셈이다.
30대 직장인 카필 쿠마르는 "인도 정부와 언론은 대기 질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모두 거짓말"이라며 "실제로는 나날이 나빠지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한국 교민 사회에도 비상이 걸렸다.
집마다 여러 대의 공기청정기를 갖추고 문풍지 등으로 문틈을 막아도 바깥 대기 오염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게 되면 실내 공기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날 오전 교민 주택 여러 곳의 실내 공기청정기 초미세먼지 수치는 500∼600을 넘어섰다.
외출할 때 사용한 마스크에도 마치 갱도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검은 오염 물질이 덕지덕지 묻었다.
한 교민은 "이런 상황에서는 두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며 "아이들과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공기가 나빠지면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정말 무섭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 주재원은 인도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공기와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주재원 충원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 자꾸 알려지면 안 된다는 기관장이나 기업 간부가 있는데 분통이 터질 일"이라며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책이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책에서나 접했던 영국 산업혁명 시기 런던의 대기오염을 21세기에 눈앞에서 보고 있다"고 한탄했다.
인도 의학연구위원회(ICMR)는 2017년에만 대기오염으로 현지인 124만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특히 시카고대 에너지정책연구소(EPIC)는 지난해 "뉴델리의 대기 환경이 WHO 안전기준을 충족했다면 그곳 시민의 기대수명은 10년 이상 더 길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오염 때문에 뉴델리 시민의 수명이 10년은 단축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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