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표현 부자유' 민낯 드러내고 폐막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14일 막 내려…'평화의 소녀상' 제한적 재전시 엿새 만에 끝나
日정부 보조금 철회·극우 협박…예술계 우경화 심화 우려
日시민사회 항의 후 전시 재개·표현부자유 자성 계기 '성과'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로 거센 논란 속에 열렸던 일본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14일 전시를 끝으로 폐막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 예술제인 이 행사는 정치인들의 외압과 우익들의 협박에 굴복해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중단하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일본 사회의 거친 민낯을 스스로 드러냈다.
전시 중단에 대한 항의 목소리가 커지며 짧은 기간이나마 소녀상의 전시가 재개된 것은 일본 시민사회에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성과'였지만, 전시 재개가 제한된 형태로 이뤄지며 '반쪽짜리'였다는 비판도 컸다.
일본 정부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트리엔날레에 대한 보조금 지급 철회를 강행해 일본의 예술계에서 정부의 의도를 미리 헤아리는 '자기 검열'이 확산할 우려가 크다.
◇ 日정부 전시중단 압박…우익 '테러협박'에 굴복한 예술제
"소녀상의 전시에 저항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전시가 중단될지는 몰랐습니다."
지난 8일 전시 재개 첫날 평화의 소녀상을 만난 뒤 전시장에서 만난 한 시민이 한탄하며 내뱉은 말이다.
매회 60만명 안팎이 관람하는 일본 최대 규모 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는 지난 8월 1일부터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不自由展)·그 후'에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했다.
이 기획전의 취지는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움직임에 의해 전시되지 못한 미술품을 선보이겠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작은 2012년 도쿄도미술관에서 전시됐지만 철거됐고 2015년 도쿄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표현의 부자유전'에 전시된 적 있다. 모형이 아닌 본 작품이 전시된 것은 이번 트리엔날레가 처음이었다.
기획전 실행위원회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에 대해 우익들의 반발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한일 갈등이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한 시점에서 일본 정부와 우익들은 예상보다 기민하게 움직였다.
전시 이틀째인 8월 2일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평화의 소녀상 전시와 관련해 "보조금 교부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겠다"며 트리엔날레에 대한 보조금을 깎을 수도 있다고 압박한 것이다.
트리엔날레가 열린 나고야(名古屋)의 시장인 가와무라 다카시(河村隆之)는 같은 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망언을 하며 "국가 등 공적 자금을 사용한 곳에서 (소녀상을) 전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공격했다.
결국 트리엔날레 실행위원장인 오무라 히데아키(大村秀章) 아이치현 지사는 전시 사흘째인 3일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기획전 자체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무라 지사가 전시회를 중단한 명분은 안전상의 우려였다. 소녀상과 함께 히로히토(裕仁) 전 일왕의 사진을 태우는 영상 전시물이 문제시됐다.
소녀상 전시 당시 트리엔날레 측에는 무려 770건의 협박 이메일이 쇄도했다. 우익들은 교토(京都)에서 발생한 애니메이션센터 방화사건을 상기시키며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겠다고 협박했고, 일부는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 "사실상의 검열" 반발한 日시민들…보이콧 선언한 작가들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자 일본 시민사회는 예술계에서 헌법학계까지 전시 중단이 사실상의 검열 조치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시민들은 전시장인 아이치현문화예술센터 앞에서 연일 항의 집회를 열었고, 일본펜클럽은 "전시는 계속돼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헌법학자, 예술 전문가 등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인 '표현의 자유를 시민의 손에 전국 네트워크'는 집회를 열고 "일본이 표현이 부자유한 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한 것으로, 전시 중단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평론가연맹은 "시민 스스로가 판단할 권리, 감상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반발했고, 일본 소비자연맹도 "시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우리들의 '자유롭게 살 권리'를 매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는 성명을 냈다.
대학 수와 변호사 등이 전개한 소녀상 전시 중단 철회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에서는 열흘 사이 6천691명이 몰리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가 나왔다. 도쿄신문은 8월 7일자 사설에서 "사회의 자유에 대한 협박이다. '표현의 부자유'를 상징하는 무서운 사태다"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거센 전시 재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트리엔날레 참가 작가들 사이에서는 "내 작품도 전시하지 말라"며 보이콧을 선언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전체 트리엔날레 참가 작가 90여팀 중 13팀이 소녀상 등의 전시 중단에 항의하며 스스로 작품 전시를 중단했다.
트리엔날레 자체가 파행을 겪고 소녀상 전시 중단 소식이 일본과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알려지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본의 모습은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스페인의 영화 제작자인 작자 탓소 베넷(62) 씨는 소녀상 전시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듣고 평화의 소녀상을 매입해 자국의 전시회에 전시할 계획을 밝혔는데, 이 소식은 EFE 통신과 푸블리코 등 스페인 언론의 보도를 통해 유럽에 퍼졌다.
◇ 반쪽짜리 전시 재개에 日정부 보조금 중단 강행…예술계 우경화 심해질 듯
이번 사태는 일본 시민사회가 거세게 반발하며 일본 사회에 '표현의 자유' 문제를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짧은 기간이나마 전시회 재개를 이뤄냈다는 점도 의미 있는 성과라는 견해도 있다.
트리엔날레 측은 기획전 집행위원들과 합의를 통해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소녀상이 포함된 기획전의 전시를 재개했다.
태풍으로 전시가 중단된 12일을 제외하면 엿새간의 짧은 전시 재개였다.
재개된 전시에는 첫날만 1천명 이상이 관람을 희망하며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13일까지 닷새 동안 추첨을 통해 뽑힌 221명이 관람을 했는데, 관람을 희망한 사람은 2천964명이나 됐다.
그나마 한정된 인원에 대해 제한된 방식으로 전시가 재개되며 '반쪽짜리'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트리엔날레 측은 하루 최대 6회에 걸쳐 1회당 30~40명씩만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조건으로 관람을 허용했다. 관람객들은 사진·영상 촬영을 하지 않고(9일부터는 사진 촬영은 허용) 촬영된 사진·영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올리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기획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안세홍 작가는 연합뉴스에 "사람들이 보는 것도, 알리는 것도 막겠다는 처사로, 전시 재개를 위한 재개이지 전시를 위한 재개가 아니다"며 "일본의 표현의 부자유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전시 재개라는 작은 성과도 있었지만, 이번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는 향후 일본 사회에서 정부의 예술제 개입 강화와 예술계의 우경화라는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가 예산을 보조하는 예술제의 내용에 개입하는 선례를 낳았고, 이에 따라 다른 예술제에서 자기 검열을 통해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은 아예 선정하지 않는 '손타쿠'(忖度·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행동함)가 퍼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는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대한 보조금 지급 철회를 강행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전시 재개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달 26일 소녀상 전시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조치로 트리엔날레에 대한 보조금 7천800만엔(약 8억7천만원)을 교부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이후 예술계의 반발에도 이런 조치를 주워 담지 않고 있다.
bkk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