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산혁명' 좌절시킨 캐리 람, 이젠 시민의 힘에 굴복

입력 2019-09-05 13:06
수정 2019-09-05 15:18
2014년 '우산혁명' 좌절시킨 캐리 람, 이젠 시민의 힘에 굴복

당시 1천 명 체포하며 '직선제' 막은 후 행정장관 자리 올라

'송환법 공식 철회'로 항복 선언…中 중앙정부에도 '미운털' 박혀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지난 2014년 '우산 혁명' 시위를 강경 진압하며 홍콩 행정 수반의 자리에 오른 캐리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이제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다.

4일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한 캐리 람 행정장관은 홍콩 내에서 '철의 여인', '홍콩판 마거릿 대처' 등으로 불렸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친(親)중국 정책만을 밀어붙이는 그의 성향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2014년 홍콩 도심을 점거한 채 79일 동안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 당시였다.

당시 홍콩 야당과 시민단체는 소수의 선거위원회가 행정장관을 뽑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에서 벗어나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홍콩 시민들은 2014년 9월 28일부터 79일 동안 도심 점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일일 최대 시위 참여 인원이 5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정무사장(정무장관)이었던 캐리 람은 홍콩 시민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시위 참여자를 체포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중국 당국의 마음에 쏙 들었고, 그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그는 30%대 지지율에 그쳐 경쟁자였던 존 창(曾俊華) 전 재정사장(재정장관)의 50%에 크게 못 미쳤다. 하지만 자신이 추진한 간접 선거제 덕분에 2017년 3월 행정장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취임 후 내각을 친중국 인사들로 채웠고, 국가보안법 재추진, 중국 국가(國歌) 모독자를 처벌하는 '국가법' 제정 추진, 반중국 성향의 홍콩민족당 강제 해산 등 친중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홍콩 온라인에는 그의 친중국 정책이 가족 배경 때문이라는 비난 글도 떠돌았다.

이 글은 "캐리 람이 영국 유학 당시 결혼한 중국인 남편은 현재 중국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며, 두 아들은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며 "캐리 람도 영국 국적을 유지하다 2007년에야 이를 포기했으며, 큰아들은 중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거침없는 친중국 행보는 그의 야망을 실현하는 최대 수단이 됐지만, 88일간의 송환법 반대 시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송환법 공식 철회'를 선언한 지금 그의 인생은 전환점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1957년 중국 저장(浙江)성 출신 홍콩 노동자 가정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람 행정장관은 다른 가정과 한 아파트를 나눠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홍콩대 재학시절 저소득층 지원과 좌파 학생 퇴학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1980년 사회과학 학사학위를 딴 후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 정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성향이 바뀌었다.

2007년 개발국장으로 선임된 후에는 많은 시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 퀸스피어(皇后碼頭) 철거를 강행해 '싸움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1년 뉴테리토리(新界) 지역에 횡행하던 불법 주택건축을 단속해 시민의 호응을 얻은 그는 2012년 렁춘잉(梁振英) 행정장관에 의해 정무사장(정무장관)으로 선임됐고, 이후 탄탄대로의 출셋길을 걸었다.

하지만 송환법 추진을 강행하다가 거센 역풍을 맞은 결과, 캐리 람 장관은 홍콩 범민주 진영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몰린 것은 물론 중국 중앙정부에도 '미운털'이 박힌 것으로 보인다.

중국 중앙정부는 오는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맞아 중국의 초강대국 부상을 대대적으로 과시해야 할 상황에서 불거진 홍콩 시위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홍콩 언론은 송환법 반대 시위가 이처럼 큰 국제적 파문을 불러온 데는 캐리 람 장관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 중국 지도부가 그를 대신할 '플랜B' 인선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당장은 그를 대신할 인사가 없어 당분간 행정장관직을 유지하겠지만, 그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퉁치화(董建華) 전 행정장관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퉁치화 행정장관의 경우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행했다가 2003년 7월 1일 50만 홍콩 시민의 반대 시위를 맞아 이를 철회했고, 결국 2년 만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하고 말았다.

2017년 7월 1일 취임한 캐리 람 행정장관의 임기는 5년으로, 2022년 6월 30일까지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송환법 공식 철회' 발표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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