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정부 '사실상 계엄령'으로 反송환법 시위 진압하나
행정장관에 비상대권 부여하는 '긴급법' 52년 만에 적용 시사
"中 의도 반영된 듯"…야권 물론 정부 내서도 '역풍' 우려
"10월 1일 건국절 전 시위 진압 원해…31일 시위 추이 관건"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가 격화하는 가운데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에 비상대권을 부여해 시위를 진압하는 방안이 제기돼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2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명보 등에 따르면 캐리 람 행정장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홍콩 정부가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검토하고 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정부는 폭력과 혼란을 멈출 수 있는 법적 수단을 제공하는 홍콩의 모든 법규를 검토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에드워드 야우 홍콩 상무경제발전국장도 "우리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홍콩의 법규에 대해 날마다 생각하고 있다"며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긴급법 적용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 이들의 발언에 홍콩 사회는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긴급법은 비상 상황이 발생하거나 공중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 행정장관이 홍콩 의회인 입법회의 승인 없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공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령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한 법규이다.
긴급법이 적용되면 행정장관은 체포, 구금, 추방, 압수수색, 교통·운수 통제, 재산 몰수, 검열, 출판·통신 금지 등에 있어 무소불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상대권'을 부여받는다.
행정장관은 이러한 비상조치를 어겼을 때 처벌도 정할 수 있으며, 그 처벌은 종신형까지 가능하다. '통금령'보다 훨씬 강한 조치로, 사실상 계엄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행정장관에게 부여되는 비상대권의 수준이 이처럼 막강하기 때문에 홍콩 역사에서 긴급법이 적용된 것은 1967년 7월 반영(反英)폭동 때 단 한 번뿐이다.
이번에 긴급법이 적용되면 5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적용되는 셈이다.
영국 통치 시절이던 당시 정부가 반포한 긴급 법령은 3인 이상 집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할 수 있게 했으며, 사법당국에 특별한 이유 없이도 시민을 체포해 1년까지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의 긴급법 검토 시사에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민주당의 제임스 토 의원은 "긴급법 적용은 홍콩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며 "이는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고, 평화적인 집회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려의 목소리는 정부 내부와 법조계에서도 제기됐다.
행정장관 자문기구인 행정회의 구성원인 친중파 레지나 이프 의원은 "긴급법에 호소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집회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을 불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러한 조치가 과연 효과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홍콩대 법학 교수인 사이먼 영은 "긴급법이 제정된 것은 1922년이지만, 당시는 홍콩과 광저우의 총파업으로 전시 상태와 같았다"며 "홍콩인권법안조례는 홍콩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만 기본적 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전직 법무관료인 존 리딩은 "긴급법이 적용되면 시민의 체포에 정당한 사유가 필요하고, 기소 전 구금은 48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것 등이 모두 폐기된다"며 "이는 송환법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 어떻게 법치주의를 논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명보는 소식통들을 인용해 긴급법 적용이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흘러나온 생각이라고 전했다.
명보에 따르면 지난 8월 초 홍콩과 이웃한 중국 도시 선전(深천<土+川>)에서는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과 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중련판)이 주최한 좌담회가 열렸다.
좌담회에서 국무원 홍콩·마카오 판공실의 장샤오밍(張曉明) 주임은 "홍콩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며 홍콩 행정장관에게 계엄령 발동 권한을 부여한 '공안조례'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친중파 소식통들은 "중국 중앙정부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홍콩 사태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중앙정부는 홍콩 정부가 자체 법규를 적용해서 사태를 수습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에 무력개입할 경우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므로, 대신 홍콩 정부가 긴급법 등을 적용해 자체 수습에 나서길 원한다는 얘기이다.
한 친중파 핵심 소식통은 "선전 좌담회 후 홍콩 정부 내에서 분명히 긴급법 적용을 논의했다"며 "다만 너무 일찍 긴급법을 꺼내 들 경우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등 여러 의견이 있어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정부는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때 국제사회의 시선이 홍콩에 쏠리는 것을 우려해 10월 1일 이전에 시위를 진압하길 원한다"며 "8월 31일 시위의 추이를 보고 긴급법 적용 여부를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환법 반대 시위를 주도해온 재야단체 민간인권전선은 지난 18일 170만 명이 참여한 빅토리아 공원 집회에 이어 오는 31일 또다시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했다.
특히 이날은 지난 2014년 8월 31일 홍콩 행정장관 간접선거제를 결정한 지 5년째 되는 날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과 영국은 홍콩 주권 반환 협정에서 2017년부터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중국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2014년 8월 31일 선거위원회를 통한 간접선거를 결정했다.
이에 반발해 일어난 것이 바로 79일 동안 대규모 시위대가 도심을 점거한 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우산 혁명'이다.
이에 따라 31일 시위에서는 지금껏 시위대가 최우선 요구사항으로 내세운 송환법 완전 철폐 외에 '행정장관 직선제'를 강력하게 요구할 계획이다.
더구나 31일 시위에서는 센트럴 차터가든 공원에서 중련판 건물 앞까지 행진할 계획이어서 심각한 충돌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지난달 21일에는 일부 시위대가 중련판 건물 앞까지 가 중국 국가 휘장에 검은 페인트를 뿌리고 날계란을 던지는 등 강한 반중국 정서를 드러냈으며, 이는 중국 중앙정부의 강한 반발을 샀다.
31일 시위에서도 일부 시위대가 중국 중앙정부를 모욕하는 행위를 할 경우 이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비난을 부르는 것은 물론 강경 대응의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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