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에게 묻다] "얼굴 빨개져도 술은 마실수록 는다"…사실일까?
분해효소 결핍은 유전…다른 간 효소가 활성화된 데 따른 착각
한두 잔에도 얼굴 빨개지는 사람에겐 술 권하지 않는 게 '매너'
(서울=연합뉴스) 신철민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김길원 기자 = "술을 마셔도 되나요? 마셔도 된다면 얼마나 마셔야 할까요?"
환자들이 음주와 관련해 흔히 묻는 것 중 하나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음주가 암 발생 위험을 높이는 연관성이 이미 규명됐기 때문이다.
국제암연구회(IARC)는 소량의 음주도 규칙적으로 하게 되면 두경부암, 식도암, 대장암, 간암, 유방암의 발생 위험을 높이고, 음주량이 늘수록 그 위험 역시 증가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흡연은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음주와 흡연을 함께 하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암 발생 위험이 더욱 커진다.
음주가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술 한두 잔은 심혈관질환 예방 및 건강에 도움이 된다거나, 와인이나 맥주는 다른 술보다 건강에 좋다는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술은 개인별 건강 상태 및 여러 다른 생활요인과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얘기하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한두 잔의 술에도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사람을 보자. 이런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술이 받지 않는' 경우여서 소량의 음주도 몸에 해롭다.
이들은 왜 소량의 음주에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까.
저마다 타고 난 '알데하이드 분해효소'(ALDH)가 다르기 때문이다. 술의 주성분인 에탄올은 체내에서 알코올 분해효소에 의해 아세트알데하이드로 바뀐다. 그리고 알데하이드 분해효소가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인체에 무해한 아세트산으로 바꿔 배출시킨다.
음주 다음 날 숙취를 유발하는 물질이 바로 아세트알데하이드인데, 알데하이드 분해효소의 활성이 감소하면 아세트알데하이드가 체내에 축적된다. 이로 인해 얼굴이 빨개지거나 피부가 가렵고, 심하면 두통 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량의 음주에도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 사람은 바로 이 알데하이드 분해효소의 활성이 유전적으로 낮은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전적 활성이 높은 사람에 견줘 음주 후 아세트알데하이드가 혈액 내에 훨씬 높은 농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음주로 인해 체내 독성물질이 빨리 증가한다는 얘기다.
이런 알데하이드 분해효소의 유전적 결핍은 주로 한국, 일본, 중국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반면 다른 아시아 국가나 유럽, 북미의 백인, 아프리카의 흑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한 연구에서는 한국인의 경우 전체 인구의 30% 정도가 이런 유전적 소인을 가진 것으로 추정했다.
흥미로운 건 10대 후반이나 스무 살 무렵 처음 술을 접할 때 얼굴이 빨개졌던 사람도 술을 계속 마시게 되면 음주로 인한 부작용이 감소하는 듯한 현상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선천적으로 알데하이드 분해효소의 유전적 결핍을 갖고 있는데도 주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흔히 '술이 세졌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알데하이드 분해효소의 결핍이 개선된 게 아니라 만성적인 음주로 다른 간 효소가 이차적으로 활성화됐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주량이 늘었다고 해서 술에 대한 체질이 바뀌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첫 술자리에서 얼굴이 빨개졌던 경험이 있다면 그 이후부터는 가능한 한 절주하는 게 바람직하다.
더욱이 숙취를 일으키는 아세트알데하이드는 악성 종양을 유발하는 1군 발암 물질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IARC는 알데하이드 분해효소가 결핍된 사람들은 같은 음주를 하더라도 식도암 발생 위험이 더욱 커진다는 보고를 내놨다.
음주가 위암 발생 위험을 증가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중국, 일본에서 진행된 여러 연구에서는 알데하이드 분해효소가 결핍된 사람이 과음하면 위암 발생 위험이 더욱 증가한다는 결과가 우세하다.
게다가 아세트알데하이드는 혈관 내피세포를 손상해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 또한 증가시킬 수 있다. 이는 곧 소량의 음주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들은 음주로 인한 고혈압 및 심혈관질환 위험 역시 높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술은 마실수록 는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주에 관대하다. 또 술을 강권하는 대학 시절 분위기나 직장의 수직적 회식문화 등으로 인해 음주를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마신다고 해도 술 분해 효소의 선천적인 기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과도한 음주에 의한 건강 및 사회경제적 문제가 크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소량의 음주에도 쉽게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에게는 소주 한 잔, 맥주 한 잔도 억지로 마시라고 권하지 않는 주변인들의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
◇ 신철민 교수는 2001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의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부터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소화기내과 교수로 재직하며, 위장관 질환 중에서도 조기 위암, 식도암, 치료내시경을 주 진료 분야로 맡고 있다. 대한소화기학회 교육위원,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보험위원, 대한소화기기능성질환 운동학회 학술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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