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세계수영] 몸에도 새긴 다이빙에 대한 애정…김수지 "제 천직이에요"
입수하는 모습 팔에 문신으로 새겨…"스프링보드, 변수 많지만 짜릿한 종목"
"동메달 따냈지만 올림픽 출전권 못 얻어 아쉬워…이제 당분간 맘껏 먹으며 쉴래요"
(광주=연합뉴스) 하남직 박재현 기자 = 김수지(21·울산시청)는 언제나 다이빙 중이다.
다이빙장 밖에서도 그의 몸에 새겨진 또 한명의 김수지가 언제나 물을 향해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19 국제수영연맹(FINA)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다이빙 종목 경기가 모두 끝난 20일. 광주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에서 김수지를 만났다.
그는 이번 대회 1m 스프링보드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다이빙 역사상 최초이자, 여자 선수 최초로 세계수영선수권 시상대에 올랐다.
올해 겨울 김수지는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과 함께 몸에 문신을 새겼다.
푸른색 수영복을 입고 수면에 닿기 직전 몸을 곧게 편 입수 자세를 취한 자신의 모습을 팔에 그려 넣었다.
매일 수십번씩 물속을 향해 뛰어드는 그는 몸에 새기고 싶을 정도로 다이빙이 좋았다.
그는 "다이빙 선수라는 직업이 너무 좋고, 제 천직이라고 생각해 문신을 새겼다"고 했다.
김수지는 겁이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다이빙을 시작한 그는 언니, 오빠들도 무서워하는 10m 플랫폼에서 두려움 없이 곧잘 뛰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 난도를 높여 어려운 동작을 연습하던 그는 입수를 잘못해 수면과 강하게 부딪혔다. 온몸에 멍이 들었다.
김수지는 "그때부터 플랫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생겼던 것 같다"며 "이후 스프링보드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스프링은 연습 때 무서움은 덜하지만, 플랫폼보다 변수가 많아 항상 긴장해야 한다"며 "그래도 도약 과정에서 보드 반동과 박자가 맞을 때 오는 쾌감과 짜릿함이 좋아 이 종목을 계속하게 된다"고 밝혔다.
언제나 자신 있는 쪽은 스프링보드였지만, 의외로 첫 올림픽의 기회는 플랫폼에서 찾아왔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2012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26명의 선수 중 26위로 대회를 마쳤다.
김수지는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나 좋은 경험을 했다"며 "꼴찌가 아니라 세계 26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도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후 김수지의 삶은 꽤 바뀌었다.
SNS 팔로워 수가 500명 늘었고,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도 부쩍 많이 받는다. 그의 고향인 울산에는 김수지의 입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그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다"며 "메달은 선수촌 숙소에 뒀는데, 종종 거기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다이빙의 새 역사를 썼지만, 김수지는 이번 대회가 오히려 아쉬움이 많은 대회라고 했다.
가장 많이 신경 썼던 종목인 3m 스프링보드에서 21위에 그쳐 18명이 겨루는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수지는 "대회 목표가 3m 스프링 결승에 올라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했다"며 "1m 동메달로 시작은 좋았지만, 마무리가 만족스럽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김수지는 자신이 '집순이'라고 했다. 휴식 시간에는 주로 잠을 자거나 집에서 직소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보낸다.
다이빙 외에는 아티스틱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춤과 같은 예술적인 요소가 들어간 점이 매력적이어서다.
세계선수권을 끝낸 김수지는 오랜만의 휴가를 받았다. 곧 전국체전을 앞두고 있어 기간은 1주일로 짧다.
김수지는 "그동안 체중 유지를 위해 식욕을 많이 참았는데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며 푹 쉬고 싶다"고 전했다.
길었던 대회를 모두 마친 김수지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경기장마다 찾아와 나를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과 잘 가르쳐주신 감독님, 코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어 건너편에 앉아있는 다이빙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엇보다 언제나 든든한 힘이 돼주는 가족 같은 대표팀 동료들에게 고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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