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붕괴30년 독일은 지금] ②"촛불혁명 없인 장벽붕괴 없었다"

입력 2019-07-02 12:00
[장벽붕괴30년 독일은 지금] ②"촛불혁명 없인 장벽붕괴 없었다"

니콜라이교회 촛불시위 주도자, 지금도 평화혁명 정신 전파 노력

시위 몰래찍어 서독 언론에 넘긴 동독의 '게릴라 기자', 숨은 영웅



(라이프치히[독일 작센주]=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이 라이프치히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촛불시위'였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동독 지역이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반 독재 평화시위가 동독 독재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후 동독 주민들이 선거에서 '신속한 통일'을 공약한 정당에 승리를 안김으로써 통일이 이뤄졌기에 당시 동독 주민들이 통일의 한 주역임을 부정할 수 없다.

◇89년 10월9일 비폭력 촛불시위의 기적

라이프치히 평화혁명의 근거지였던 니콜라이 교회에서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만난 게지네 올트만(54) 평화혁명재단 이사는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교회 내 한쪽 방에는 30년전 시위에 나선 올트만 씨가 현수막의 한 쪽을 붙들고 있는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미소 군비경쟁이 치열했던 1980년대 초반부터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기도하려는 소수 신자들의 모임이었지만, 점점 교회 밖으로부터도 많은 이들이 모여 들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는 집회로 커졌다.

운명의 10월 9일. 동독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시위대 수는 7만명에 달했다. 그들은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유명한 구호와 함께 정치범 석방, 자유선거 등을 요구하며 도시 곳곳을 행진했다.



올트만 씨는 "기도회 종료 후 모두 교회밖으로 나와 동그랗게 도시를 돌면서 행진했는데 엄청난 규모였다"며 "경찰의 폭력도 없었다. 연대와 비폭력의 시위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일 교회에는 동독 집권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 약 600명이 예배당을 채우고 있었고 군대, 경찰 등을 동원한 유혈 진압 준비도 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위대가 촛불을 들고 교회 밖으로 나와 행진할 때 군경은 시위지도부와 대화 속에 철수했고,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동독 SED 정권은 무력진압 계획을 접었고, 그로부터 9일 후인 1989년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 SED 서기장이 사임했다.

당시 니콜라이 교회 목사였던 크리스티안 퓌러는 교회 안내 책자에 "그 밤은 예수님의 영(靈) 가운데 있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 승리감을 갖지 않았고 자존감을 잃지도 않았다. 엄청난 안도감만 있을 뿐이었다"고 썼다.

평화혁명재단 미하엘 쾰쉬 이사장은 "비폭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혁명으로,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통일 이후 평화혁명재단은 자유와 정의 등 평화혁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 상영회와 대담 행사, 국제 민주주의 축제 등 사업을 해왔다. 올해 10월 9일에는 평화혁명 30주년을 맞아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쾰쉬 이사장은 한국 기자들에게 "우리가 남북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알려달라"고 말했다.

◇촛불혁명의 '불씨' 나른 게릴라 언론인 셰프케 씨

독일 작센안할트주, 작센주, 튀링엔주를 사업 범위로 하는 공영방송인 중부독일방송(MDR)에서 만난 지그베르트 셰프케 씨는 라이프치히 촛불혁명의 소식을 전세계에 알린 숨은 영웅이다.



언론과 무관한 건축 엔지니어였던 그는 역사적인 시위를 몰래 촬영한 뒤 동독 주재 서방 외교관 편으로 테이프를 서독 언론에 넘김으로써 시위 상황에 서독은 물론 전세계가 주목하게 만들었다.

어느 동독내 제도권 언론도 찍지 못한 라이프치히 촛불시위의 영상이 서독TV를 통해 보도되자 동독 반체제 시위의 물결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갔다.

위험천만한 일을 한 이유에 대해 셰프케 씨는 "동독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타인이 보도하지 않는 것을 취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셰프케 씨는 독일 통일후 중부방송에 취직해 정식 언론인 생활을 해오고있다.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언론인들의 '반성'

당시 시위에 동조하면서도 참여하지 못했던 기자들의 반성과 부채의식도 엿볼 수 있다.



'평화혁명의 영웅들'이라는 책을 펴낸 토마스 마이어 전(前)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 기자는 통일 후에도 '살아남은 동독 기자' 중 한명이다. 평화 시위 당시 근무시간 중에 시위현장을 취재하지 못했던 그는 사무실서 내근하며 숨을 죽이고 있다가 퇴근후에 시위대열에 합류하곤 했다.

마이어 씨는 "세계적으로 폭력없이 체제를 무너뜨린 유일무이한 사례"라며 "평화시위가 없었더라면 장벽 붕괴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달 24일 취재진과 만난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1989년 6월24일자 자사 기사를 정확히 30년만에 다시 게재한 신문 지면을 보여주었다.

타지역에서 시위 참가차 라이프치히를 찾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시위가 사회 안정의 저해요소라는 비판을 담은 기사였다.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30년전 기사를 그대로 다시 실은데 대해 "기억하기 위해"라며 "당시 잘못됐던 보도행태를 비판적으로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연수 과정의 하나로 취재·작성되었습니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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