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문화 중심에서 '큰 획을 긋다'…정도준 한국서예 퍼포먼스

입력 2019-06-17 07:51
LA 문화 중심에서 '큰 획을 긋다'…정도준 한국서예 퍼포먼스

문화 1번지 LA카운티미술관서 초대형 붓 들고 화려한 필치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16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라브레아에 있는 LA카운티미술관(LACMA).

미 서부 최대 미술관이자 LA 문화예술의 1번지로 통하는 곳이다.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빛 조형물 '어번 라이트' 앞에 초대형 화선지가 펼쳐졌다.

화선지 옆에는 얼추 사람 키 만한 붓이 놓였다. 붓을 적실 만한 크기의 벼루가 없다 보니 아예 커다란 들통에다 먹물을 한가득 부어뒀다.



복원된 국보1호 숭례문 상량문을 쓴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72) 선생이 두루마기를 벗고는 양손으로 붓을 붙잡고 힘차게 놀리기 시작했다.

검은 먹이 강한 직선과 유연한 곡선을 그리면서 미끄러져 내려가자 커다란 한글 글자가 하나씩 또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의 힘.'

네 글자를 쓰는 정 선생의 화려한 붓놀림에 생전 처음 서예 퍼포먼스를 접하는 현지 미국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행사장에선 '저렇게 큰 붓을 본 적이 없다'며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휴일을 맞아 미술관을 찾은 가족 단위 방문객도 꼬마들의 손을 붙잡고 신기한 듯 저마다 휴대전화를 들어 서예 퍼포먼스 영상을 담기 바빴다.

경남 진주에서 서예가 유당(惟堂) 정현복의 아들로 태어난 정도준은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에게서 서예를 배웠고, 1982년 제1회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후 30년 넘도록 해외에서 17차례 개인전을 열며 한국 서예의 아름다움을 알려왔다.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 있는 흥례문(興禮門)과 창덕궁 돈화문 너머에 자리한 진선문(

進善門) 현판에 이어 숭례문 상량문을 쓰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미국 서부에서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LA카운티미술관에서는 흔치 않은 서예전을 열었다.

'선을 넘어서'(Beyond Line)로 명명된 서예전의 개막 퍼포먼스로 미술관 정문 앞에서 큰 글씨를 시연한 것이다.

사회자는 "정 선생이 우주에서 가장 큰 붓을 가져왔다"라고 소개했다.

정도준은 "큰 글씨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한국 서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힘이란 백범 김구 선생이 하신 말이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이 문화의 힘이요, 이는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라고 설명했다.



화선지를 걷고 다시 펴는 데만 20분 남짓 소요된 퍼포먼스에서 정 선생이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한자로 '원원유장(源遠流長)'을 썼다.

한글은 가로 필치로, 한자는 세로 필치로 붓을 놀렸다.

그는 "샘이 깊으면 멀리 흐른다는 뜻인데, LA를 시발점으로 해서 한국 서예가 더 길게 뻗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서예 시연을 바라보는 한 미국인에게서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다.

'서예는 미리 머릿속에 그려둔 글씨를 쓰는 것이냐, 아니면 즉흥적으로 붓을 옮겨가며 쓰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정도준은 "놀라운 질문이다. 서예는 쓰는 도중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것을 즉흥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또한 서예이다"라고 답했다.



oakchu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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