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우린 폭도가 아니다" 홍콩 도심 가득 메운 144만 '검은 시위대'
시위대 90% 이상 젊은 층…"12일 시위대, 폭도 규정에 강한 분노"
경찰 강경진압 항의하고자 검은 옷 '상복 시위'…"캐리람 퇴진" 요구
빈과일보 "시위 참가자 최대 144만"…홍콩 시민 5명 중 1명 시위 나와
15일 송환법 반대 고공시위하다 추락사한 시민에 '추모 꽃다발' 봇물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학생들은 폭동을 저지르지 않았다"
16일 홍콩은 분노의 검은 물결로 뒤덮였다. 틴하우, 코즈웨이베이, 완차이, 애드머럴티 등 홍콩의 도심 곳곳은 검은 옷을 입은 시위대가 장악했다. 거리는 물론 지하철역과 열차 안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검은 옷은 '상복'을 의미한다. 12일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일부는 2014년의 대규모 도심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을 기리기 위해 우산을 든 모습이었다.
12일 수만 명의 홍콩 시민이 입법회 건물 주변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 저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 등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홍콩 경찰이 시위대에 고무탄 등을 사용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은 이를 "노골적으로 조직된 폭동의 선동"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우린 폭도가 아니다"…홍콩 '검은 시위대' 도심 가득 메워 / 연합뉴스 (Yonhapnews)
지난 9일 100만인 시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던 팻말이 '반송중(反送中)'이었다면, 이날 시위에서 가장 많이 든 것은 '학생들은 폭동을 저지르지 않았다(學生沒有暴動)'는 팻말이었다.
강경 진압에 대한 캐리 람 장관의 사과는 물론 사퇴까지 요구하는 팻말이 곳곳에 보였다. 전날 람 장관이 송환법 연기를 발표했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학을 막 졸업했다는 니콜 씨는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최루탄과 고무탄을 퍼부어놓고는 이를 '폭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캐리 람 장관은 당장 물러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날 시위에 모여든 홍콩 시민의 숫자가 웅변해 줬다.
홍콩 빈과일보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 이날 모인 집회 참가자의 수가 지난 9일 시위 때 103만 명을 뛰어넘어 최대 144만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홍콩 인구가 740만 명이므로, 홍콩 시민 5명 중 1명이 집회에 나온 셈이다.
시위를 주도한 재야단체 연합 민간인권전선은 오후 2시 30분(현지시각) 빅토리아 공원에서 집회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공원은 집회 시작 2시간 전부터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시위에 참여하려던 사람들은 빅토리아 공원에 접근하기는커녕 인근 틴하우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애드머럴티 등 인접한 역들에서는 안전을 위해 열차를 무정차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시위 참가자의 90% 이상이 젊은이들로 이뤄졌다는 점이었다. 통상 6·4 톈안먼 시위 기념집회, 7·1 주권반환일 시위 등은 중장년층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날 시위는 젊은이들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여름방학을 맞아 홍콩으로 돌아왔다는 조너선 씨는 홍콩 정부에 대한 분노가 젊은이들을 거리로 불러모았다고 분석했다.
홍콩에 돌아온 후 지난주부터 시위에 계속 참여했다는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송환법은 홍콩의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송환법 추진도 모자라서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폭도'로 몰아세우고 있으니 홍콩 젊은이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더구나 전날 밤 정부청사 인근 유명 쇼핑몰인 퍼시픽 플레이스에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고공시위를 벌이던 30대 남성 량(梁) 모 씨가 추락사한 것은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됐다.
이날 시위 참여자 중 많은 사람이 량 씨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하얀 국화꽃 등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홍콩 시민들은 사고 현장을 찾아가 수많은 꽃과 촛불, 편지로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을 전했다.
홍콩 언론과 시민들은 유튜브,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로 시위를 생중계했고, 전 세계 네티즌들은 실시간 댓글을 달며 지지를 나타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 대투쟁,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 등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대학가에 홍콩 시위 지지 포스터가 붙고, 소셜미디어에서도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14일 홍콩 어머니 6천여 명이 모여 벌인 촛불집회에서는 한 어머니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노래를 부른 어머니는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을 본 홍콩인들은 이 노래에 대해 잘 알 것"이라며 "2017년 100만 명의 사람들이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한 서울대 재학생은 이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전하면서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치적 견해 차이를 극복하고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서는 홍콩에 사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초등학생 딸과 아들을 데리고 시위에 참여한 뉴질랜드인 딘 씨는 "홍콩에 10년째 살고 있으므로 나도 홍콩인"이라며 "송환법 추진으로 홍콩의 자유가 무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캐리 람 장관의 송환법 추진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날 친중국 신문 대공보가 시내 대형 전광판에 홍콩 당국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중국 외교부 성명을 띄우자, 시민들이 거센 야유를 퍼부었고 이에 놀란 신문사 측이 전광판 운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홍콩 업무를 총괄하는 한정(韓正)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천<土+川>)에서 이날 시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다는 소문도 들렸다.
사회에 진출한 지 6년이 지났지만 현 시국을 방관할 수 없어 후배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는 알렉스 씨는 "캐리 람 장관이 송환법 연기를 발표했지만, 중국은 향후 송환법 재추진을 위해 기회를 노릴 것"이라며 "우리는 '홍콩의 중국화'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송환법 완전 철회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위 규모에 놀란 캐리 람 장관은 이날 저녁 긴급 성명을 내고 "홍콩 사회에 커다란 모순과 분쟁이 나타나게 하고, 많은 시민을 실망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한 점에 대해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송환법 반대 시위 후 그가 시민들에게 직접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콩 언론은 캐리 람 장관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분석 기사를 내놓았으며, 친중국 성향의 동방일보는 이날 "홍콩 정부의 통치권은 끝장났다"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장식하기도 했다.
ssah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