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서 점점 선택 강요당하는 한국기업
중국, 삼성·SK하이닉스 등에 경고…미중 사이에 끼어 피해볼까 우려도
(베이징=연합뉴스) 김윤구 특파원 =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기업이 점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상무부, 공업정보화기술부는 지난 4∼5일 주요 글로벌 기술 기업을 불러 트럼프 정부의 요구대로 중국 기업에 대한 부품 공급을 중단하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당국에 불려간 기업에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델, 영국 반도체설계업체 ARM을 비롯해 한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도 포함됐다.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게 된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華爲)의 임원이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을 찾아 부품 공급이 중단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진 데 이어 정부까지 나선 셈이다.
이들 기업은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할 계획은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는데도 중국 정부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 상무부는 자국 기업에 공급중단 조치를 하거나 자국 기업의 정당한 권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외국기업 등을 '신뢰할 수 없는 실체 명단'에 올리겠다고 지난달 31일 발표한 바 있다.
삼성 등이 미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웨이에 대한 부품 공급을 끊으면 중국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자칫 중국과의 관계가 삐끗하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에 화웨이는 5대 매출처 가운데 하나다. 삼성은 스마트폰 분야에서 화웨이와 경쟁하면서도 이 업체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공급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매출 가운데 중국의 비중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급격히 높아졌다.
이들 기업은 거대 시장인 중국에서 계속 사업하고 싶어하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업체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중국 정부가 글로벌 기업들에 경고했다는 보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도 "어쩌다 우리가 미국, 중국 사이에 끼어 참 난감한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가뜩이나 중국에서 반도체 반독점 조사를 받고 있다. 무역전쟁 전개 양상에 따라 반독점 조사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까 봐 우려하고 있다.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은 지난해 5월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3사에 대해 반독점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 3사의 D램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95%가 넘는데 독과점적 지위를 남용해 제품을 고가에 팔았다는 의혹이 조사 대상이다.
미국이 무역전쟁 속에 화웨이 봉쇄 전선을 형성하려고 하지만 중국은 이를 깨뜨리려고 한국 등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게 최근의 형국이다.
중국 외교부 당국자는 최근 베이징을 방문한 한국 기자들을 만나 미중 무역전쟁 속에 한국이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정부나 기업의 판단에 따라 한중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은 미국 상무부가 보안 문제를 이유로 화웨이를 거래제한 기업 목록에 올린 뒤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에 화웨이와 거래하지 말라고 요청한 것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처럼 한국이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중간에 끼어 피해를 보는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부 전문가는 현재 미중 양국의 분쟁 수위가 높아지는 양상을 기술 냉전으로 진단하면서, 기술 냉전으로 세계가 2개의 경제 진영으로 쪼개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영국을 방문했을 때도 영국 정부에 화웨이 제재 동참을 요구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 총회에서 미국의 화웨이 제재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중국 편에 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러시아 국빈방문에 맞춰 화웨이와 러시아 통신업체는 5G 협력도 선언했다.
미국과 중국의 편 가르기에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싱가포르 외교장관도 지난달 미국을 방문해 "중간에 있는 우리 같은 소국들로선, 억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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