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노르망디 해안에서 연합군 약 1만명 사상
'D-DAY'는 상륙작전 출정 일자를 지칭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서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시키고 2차대전의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단행됐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진 지 올해로 75주년.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트럼프 미 대통령과 영국 정부 대표 등 당시 연합국 수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합군이 출정한 영국 남부 포츠머스와 상륙작전이 벌어진 노르망디에 등에서 벌어진다.
유럽의 역사를 바꾼 전무후무한 작전이었던 만큼 에피소드도 많다. 연합군이 사용한 'D-DAY'라는 어원을 둘러싸고 아직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과연 노르망디 작전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는지도 역사가들의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 캐나다, 프랑스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 16만명은 독일군의 예상을 벗어나 프랑스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한다.
나치 독일은 연합군이 영국과 가장 가까운 파드 칼레나 벨기에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상륙에 앞서 노르망디에 공수부대를 투하할 경우 대원의 75%가 희생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나 투하를 강행했다.
결국 악천후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1진은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오마하 비치와 주노 비치에 상륙한 미군과 캐나다군의 피해가 컸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그날 밤까지 노르망디 5개 해안을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히스토리 사이트(history.com)에 따르면 상륙작전이 벌어진 이틀 후인 6월 8일 당시 희생된 장병들을 안장하기 위한 최초의 유럽 지역 연합군 묘지가 조성됐다. 또 미국에는 버지니아 베드퍼드에 있는 '국립D-DAY 추모재단'이 연합군 희생자들을 관리하는 기관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는 현재 노르망디에서 전사한 4천414명의 장병의 이름이 청동 명판에 새겨져 있다. 2천501명이 미군이고 1천913명은 타국 소속 연합군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24시간 동안 사망한 연합군 장병들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 당시 해안을 방어하던 독일군 사망자는 4천-9천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연합군은 약 20만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관계자들은 이러한 추정을 토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약 1만명의 연합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오마하 비치에서 미군은 2천명의 전사자와 부상 및 실종자를 기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스워드 비치와 골드 비치에서는 약 2천명의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했고 주노 비치에서는 캐나다군 340명이 전사하고 574명이 부상했다.
사상자들은 주로 해안에 처음 상륙한 1진 병사들이 많았고 이들은 상륙정에서 내리자마자 독일군의 집중 기관총 사격을 받아 인명피해가 컸다.
당시 버지니아 베드퍼드 출신 19명의 젊은이가 선발대로 해안에 상륙했다 모두 전사했으며 이는 마을 인구에 비례해 가장 많은 젊은이가 희생된 것이었다. 국립 D-DAY 추모재단이 이곳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유다.
'D-DAY' 논란도 진행형이다. 'D'는 작전개시일(day)를 지칭하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H-HOUR'는 시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단행된 직후부터 'D-DAY'의 의미를 묻는 독자들의 질문이 제기돼왔다고 전했다.
통상 D-DAY는 결정되지 않은(혹은 기밀의) 작전개시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1차 대전 중인 1918년 미 육군 제1군(軍)의 야전 명령에 처음 사용된 것이라고 타임은 밝혔다.
반면 프랑스 측은 D가 '상륙'(disembarkation)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누군가 1964년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설명'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이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비서를 시켜 "모든 상륙작전은 출정 일자(departed date)가 있으며 이를 줄임말로 D-DAY가 사용된다"는 답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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