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영웅 판도린에 웃고 울다…아쿠닌 '아자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순수문학 강국 러시아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대중 문학, 특히 장르 문학 강세가 이어졌다. 특히 추리 소설 인기는 폭발적이라고 한다.
이런 열풍을 주도한 작가가 바로 보리스 아쿠닌. 그가 탄생시킨 형사 캐릭터 '에라스트 판도린'은 실제 인물이 아닌데도 러시아인들이 영웅처럼 좋아하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셜록 홈스'라는 별명도 있지만 홈스나 뒤팽 등 '완벽형 천재 탐정'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냉철한 추리력과 분석력도 있긴 하지만, 때론 어이없는 실수도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며 좌충우돌하는 스타일이다.
마치 당장 내 곁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판도린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에 소박하고 강인한 성품의 러시아인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할리우드식 히어로가 아니라 악전고투 끝에 겨우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하는 판도린의 활약에 억눌리고 불안한 러시아인들은 대리 만족하면서 환호한다.
게다가 판도린은 부모를 잃고 고학해 겨우 초급 관리가 된 인물로 공감 능력과 희생정신도 갖췄다. 독재 정권의 부정부패와 범죄에 시달리는 러시아 서민들이 아들, 형, 삼촌으로 여길만한 친근하고 평범한 휴머니스트다.
이런 판도린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는 현재까지 16권이나 출간됐고 러시아에서만 무려 3천만 부가 팔린 엄청난 히트작이다.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돼 현재까지 계속 출간 중이다.
그 첫 시리즈인 '아자젤'(아작 펴냄)이 한국에 소개된다. 배경으로 약관 초급 경찰 판도린이 거대한 범죄조직 아자젤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아자젤은 문명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적 조직이다. 1876년 모스크바에서 한 청년이 자살한 사건을 수사하던 판도린은 자살 원인이 목숨을 건 내기 때문임을 밝힌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빠진 청년이 친구와 모종의 내기를 한 것인데, 사건 실마리를 풀어나갈 즈음 정체불명의 자객이 판도린을 공격한다.
그 자객으로부터 얻은 배후에 대한 단서는 짧은 세 음절뿐이었다. "아자젤."
작가 아쿠닌이 반체제 인사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것은 획일적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악의 소굴로 보인다. 아자젤 지도부는 나치처럼 우생학에 관심 있고 스탈린처럼 인간 개조를 시도한다.
추리 소설이지만 판도린 시리즈는 순수문학적 미덕과 품격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화와 역사적 요소가 숨어 있고 세밀한 필치로 근대 러시아를 그려낸다. "톨스토이가 추리소설을 썼다면 바로 이럴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아쿠닌이 추리소설 작가이긴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낳은 문화적 토양에서 살아온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로 '악인'이란 뜻의 아쿠닌은 본명이 그리고리 샬로비치 치하르티시빌리. 본명으로는 일본 문학과 동양 문화에 대한 에세이를 펴내고 '아나톨리 브루스니킨', '안나 보리소바'라는 필명으로 일반 소설도 쓴다. 352쪽. 1만4천800원.
lesli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