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도, '미국 전쟁'도 아닌 '나의 전쟁'"

입력 2019-05-30 10:41
"'베트남 전쟁'도, '미국 전쟁'도 아닌 '나의 전쟁'"

비엣 타인 응우옌의 저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베트남은 근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나라다. 1천여 년 동안 외세에 저항하며 독립 의지를 강하게 불태웠다. 중국, 프랑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고, 10년이 넘는 전쟁 끝에 미국마저 몰아내고 통일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당당하게 수립했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속칭 '맞짱'을 떠서 승리한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하다.

1800년대 후반부터 끈질기게 베트남을 식민 통치한 프랑스. 일제 패망 후 또다시 침략했으나 10년 가까운 고투 끝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마지막으로 베트남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하지만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가운데 또 다른 강국이 대대적으로 파고들었으니 바로 최강 미국이었다.

독립과 통일을 향한 전쟁은 호찌민(胡志明)이 시대적 지도자로 앞장선 가운데 치열하게 전개됐다. 가난한 나라 한국도 자유 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파병해 북베트남을 상대로 미국 등과 함께 싸웠다. 결과는 북베트남의 세기적 승리. 이 전쟁에서 패퇴한 미국은 5만8천 명가량의 인명손실을 입었고, 한국도 5천여 명이 희생됐다. 반면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무려 4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엄청난 인적·물적 타격을 입어야 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의 비엣 타인 응우옌(48)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전쟁의 흔적을 집중 취재해 그 결과물로 신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를 내놨다. 이 논픽션 에세이집은 저자가 베트남 출신의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논점이 유다르다. 1971년 베트남에서 태어난 저자는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해상 난민이 돼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베트남인의 관점도 아니고, 서구인의 관점도 아니며, 전쟁세대의 관점도 아닌 제3자의 시각으로 전쟁을 탐구한 이번 저서가 나올 수 있는 개인사적 배경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미국이 저지른 짓에 실망했지만 미국의 변명을 믿고 싶어 하는 베트남인이다. 베트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베트남을 알고 싶어 하는 미국인인 것 같다."

같은 전쟁이지만 보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명칭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국인은 당시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미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마치 한반도의 6·25전쟁을 남쪽에서 '한국 전쟁'이라고 하는 반면, 북쪽에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저자는 '베트남 전쟁'도, '미국 전쟁'도 아닌 '그 전쟁'이나 '나의 전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떠올려 해석한다.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처럼 독특한 시각의 장편소설 '동조자'로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 속에서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비인간성을 직시해야 한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공정한 기억이 이뤄져야 공정한 망각도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인간인 동시에 비인간임을 늘 인식하면서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를 뛰어넘고, 전쟁기계의 기억에 저항하고, 불가능할지도 모르나 평화를 상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책 제목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 한 구절인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Nothing ever dies)'에서 따왔다. 전쟁이 끝나도 개인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부제인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이 함축하듯이 자신뿐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윤리로 확장하자고 권유한다.

돌이켜보면 베트남과 한국은 서로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뒤 각각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게 바로 그렇다. 다른 점이라면 베트남은 자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은 이룬 반면에 한국은 70년이 넘도록 대립과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분단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베트남에서 싸웠던 전쟁은 잊힌 전쟁"이라면서 "베트남에서 치른 또 다른 한국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기억되지 않으며, 모든 민족들에게 고질병인 기억 상실과 선택적 기억으로만 드러난다"고 안타까워한다. 우리로선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비대칭적 기억과 망각의 배경을 이같이 드러낸다.

"국가는 기억과 망각을 모두 계발하고 독점하려 한다. 시민들에게 그들 국가의 기억만을 남기고 다른 기억은 잊어버리도록 독려한다.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할 민족주의와 인종, 민족, 종교의 공동체 안에서만 순환하는 자기중심적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기억만 남기고 타자의 기억을 잊게 하는 이러한 지배적 논리의 힘이 너무 강해서 이미 소외된 사람들조차 기회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타자를 잊는다. 기억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망각의 죄로부터 결백한 사람은 없다."

더봄 펴냄. 부희령 옮김. 440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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