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아입니다!"…장년의 '청춘' 돌려준 화끈한 나훈아

입력 2019-05-18 08:43
수정 2019-05-18 16:53
"신비주의 아입니다!"…장년의 '청춘' 돌려준 화끈한 나훈아

'2019 청춘 어게인' 공연에 1만여 관객…목소리·입담·연출 '명불허전'

무대서 무릎 꿇고 인사…시스루 의상·찢어진 청바지에 "섹시하다" 함성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저보고 신비주의 우짜고 저짜고 하는데 아입니다. 신비주의는 무슨 얼어 죽을 신비주의, 절대 아입니다."

가수 나훈아(본명 최홍기·72)의 단호한 한마디에 객석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는 꼬라지 배기 싫어 갖고 제가 안 나가는 것뿐이고, 하도 거짓말을 해제끼 싸서 제가 기자들도 안 만나는 것뿐이지, 내 할 거 다 하고. 어이?~"

중장년 여성 관객들은 그가 경상도 사투리 사이 섞는 '어이?'란 추임새를 따라 하며 마치 소녀처럼 손뼉을 쳤다. 공연 중간 몇몇 팬이 꽃다발을 전달하자 "얼마나 좋을까"란 부러움 섞인 대화도 들려왔다.

올해 데뷔 53주년을 맞은 나훈아는 '어르신들의 방탄소년단'이란 누리꾼 수식어처럼 공연장을 화끈한 에너지로 집어삼켰다.

지난 17일 오후 7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19 청춘 어게인'(靑春 again) 첫날 공연.

공간을 지배하는 나훈아 육성은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명불허전'이었다.

그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소리로 때론 절절하게, 때론 절도있게 곡조를 갖고 놀았다. 고음의 진성도, 저음의 깊은 울림도, 수려하게 '꺾는' 창법도, 음을 길게 늘이는 호흡도 자유자재였다.

젊은 날, 여심을 흔들던 야성미 넘치는 캐릭터도 냉동된 듯했다. 다부진 체격에 구릿빛 피부, 부리부리한 눈빛, 고른 치아를 드러내고 씩~ 웃는 미소까지….

"아까 들어오는데 어떤 할무이가 오빠 카드만~. 그때 제가 할밴지 알았습니다."

특유의 쇼맨십은 무대 위 의상 교체에서도 십분 발휘됐다. 그가 예스러운 도포부터 속이 훤히 보이는 시스루 의상, 찢어진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 셔츠까지 소화하자 60~70대 관객들은 "섹시하다", "오빠, 멋있다', "행님아"라며 즐거워했다.



공연은 관객의 힘찬 함성으로 시작됐다.

"하나, 둘, 셋, 나.훈.아!"

청춘 나훈아의 흑백 사진이 흘렀다. 이어 빗줄기가 내리는 스크린에 건반을 연주하며 '예스터데이'를 부르는 나훈아 영상이 띄워졌다.

분위기 있는 오프닝과 달리, '실물' 나훈아의 등장은 밝고 화려했다.

첫 곡으로 자작곡 '땡벌'(1987)을 택한 그는 왕벌처럼 노란색, 검은색이 섞인 망토를 걸치고 댄서들과 흥겹게 분위기를 예열했다.

그는 초반 내리 30여분을 노래로 채웠다. '물레방아 도는데'(1973), '잡초'(1982), '가라지'(1983), '무시로'(1989) 등을 절도있는 손짓과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이어갔다. 레퍼토리 대부분이 자작곡으로, 매곡 가사가 자막으로 흘러 자연스레 관객과 합창이 됐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날씨도 더븐데 본전 생각 안 나시게 잘하겠습니다." 나훈아의 첫 마디였다.

손수 연출한 무대는 곡 분위기를 살린 다채로운 영상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위트가 넘쳤다. 영상에 새가 등장하면 알록달록한 '진짜' 새가 공연장을 날았고, 손짓에 폭죽이 터지면서 기타가 나타나는 마술도 선보였다.

그는 또 현악기 연주자가 가세한 빅밴드를 지휘자처럼 리드했고, 넉살 좋은 구수한 입담으로 장년층이 공감할 옛이야기를 풀며 관객을 꽉 붙들었다.

"옛날에 우리 어무이들이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그땐 먹고 살기 어려법기 때문에 아를 업고 와가지고 장사를 하다가 아가 울면 젖을 훌러덩 넘겨 먹이고…." 5월에 잘 맞는 "어무이에 대한 노래"라며 '홍시'를 소개하면서다.



강렬한 연출은 '저승사자'란 제목이 붙은 무대. 천둥번개가 치더니 각각 검정색·흰색 갓과 두루마기 차림의 저승사자와 이승사자 팀이 양쪽에서 등장했다.

붉은 도포를 입은 나훈아는 이승과 저승사자가 잡고 있는 흰색, 검정색 끈을 한손에 움켜쥐고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유쾌하게 개사해 노래했다.

또 '공'(空·2003) 무대에선 판소리 하듯 부채를 펼치며 '띠리 띠리띠리리리 띠 띠리띠 띠리'란 후렴구마다 노래를 끊고 말을 섞었다.

"('공') 가사에 '살다보면 알게 돼'가 있는데, 알면 이미 늦어뿌니 알지 마이소. 인생이 뭐냐, 청춘이 뭐냐, 아무 쓰잘데기 없는 소립니다. 알기 전에 했뿌이소. 오늘 하고 싶은 거 무조건 해야 합니다. 어짜피 죽을 깁니다."



'청춘 어게인'이란 공연 타이틀처럼 회춘 레퍼토리는 내내 흥을 돋웠다.

나훈아는 "공연장에서 나올 때는 젊어져서 나와 아들이 아부지, 어무이를 몰라볼지도 모른다"고 자신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절대 그냥 못 보냅니다. 오늘 오신 분들 중에 자식들이 표를 구해가지고 '갔다 오십시오'하고 온 분들이 많기 때문에…오늘 제가 책임이 큽니다. 와 이리 늙었는교. 지금부터 (공백기) 11년간 못 돌려드린 청춘을 돌려드릴 테니 받으이소."

그는 공연 직전 진행한 '신청곡 이벤트'에서 최다 표를 받은 '내 청춘'(1981)을 즉석에서 불러줬고, "우리 아버지들이 기가 많이 죽었다"며 남성 관객의 '아자, 아자, 아자' 삼창을 유도한 뒤 '남자의 인생'(2017)을 구성지게 뽑았다.

청바지와 민소매 셔츠를 입고 '청춘을 돌려다오'를 부를 땐 관객들이 절로 어깨춤을 췄다. 나훈아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처럼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를 누볐다. 셔츠를 적실 정도로 땀을 쏟았다.

평소 소신대로 전통 가요 외길에 대한 꼿꼿한 자존심과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2004년 한 일간지에 칼럼을 써 전통 가요를 '트로트', '뽕짝'이 아닌, '아리랑'으로 부르자 제안하고 자신을 '아리랑 소리꾼'이라고 칭했다.

"전 평생 우리 전통 가요를 불렀습니다. 옛날 동학란(동학농민운동) 때 '새야 새야 파랑새야'나 혹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전통 가요의 원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한 얘기에 이의가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제가 이론적으로 역사, 지리, 민족성 다 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일부 전통 가요들이 금지되는 수난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제 노래도 하나. '울긴 왜 울어'(1984)를 부르는데 아마 저 높은 데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며 한마디를 했던 모양입니다. (성대모사를 하듯) '쟤는 왜 자꾸 울어제껴'. 이 한마디에 저는 그냥 방송 출연을 못 했습니다."

올해 60주년을 맞은 이미자는 그에게 전통의 소리를 지키며 시대를 동행한 선배다.

"뉴스에서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하는 얘길 봤는데. 하~ 마음이 쌔~한기. 그래 나는 언제까지 할 수 있겠노." 헌사를 보내듯 그는 통기타를 연주하며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노래했다.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은 앙코르 무대에서도 엿보였다. 앙코르 대신 '또'라고 외쳐달란 그의 말에 몇 차례나 '또, 또, 또'란 함성이 울렸다.

그는 '너와 나의 고향'(1969), '고향역'(1972), '영영'(1990) 등을 잇달아 선사했다. 두 팔을 벌리고 포효하듯, 주먹을 불끈 쥐고 애달프게 소리를 토해냈다.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영영' 중)라고 음을 길게 뺄 땐 박수가 쏟아졌다.

최근 발표한 새 앨범 '벗2' 타이틀곡 '자네!'(2019)를 열창한 그는 무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객석을 지긋이 바라봤다. 다시 일어난 그가 출연진과 함께 90도로 인사하고 무대 뒤로 뛰어 들어가자, 2시간여 공연은 막이 내렸다.



새 투어는 나훈아가 지난 2017년 칩거 11년 만에 올림픽홀에서 연 컴백 공연 때보다 규모가 대폭 확장했다. 1만석이 넘는 체조경기장에서 3일간 열릴 서울 공연 티켓은 12만1천~16만5천원으로 고가였지만 8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온라인에는 효도용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에 성공한 30~40대 자녀들의 '금손' 인증 글이 올라왔다. 전통 가요를 50여년 간 고집한 가수가 최정상급 아이돌 그룹만 서는 공연장을 꽉 채운 것도 '레전드' 인증이다.

공연장에서 만난 65세, 61세 자매는 "나훈아 씨 노래에는 희로애락이 담겨있어 울컥하다"며 "젊은 날부터 팬이어서 며느리가 밤을 꼬박 새워 티켓을 사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나훈아 등신대(等身大)와 사진을 찍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부, '신청곡 이벤트'란에 하트 스티커를 붙이는 노모를 카메라에 담는 중년 딸, 공연장에 내걸린 대형 포스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60대 여고 동창 등 저마다 설렌 표정이었다.

나훈아 공식 팬클럽인 '나사모' 천막에는 밴드에 가입하려는 팬들이 잇달아 방문했다.

나사모 한유섭(57) 사무총장은 "2017년 컴백 때부터 지난해, 올해까지 모든 공연장에 팬클럽이 함께 하고 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무대에서 공연이 열려 무척 뿌듯하다"고 말했다.

공연은 같은 장소에서 18~19일 열린 뒤 6월 8~9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15~16일 대구 엑스코, 29일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 7월 6일 울산 동천실내체육관으로 이어진다. 지방 공연은 2~4분 만에 매진됐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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