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등댓불 계속 밝힐 수 있도록 정부가 잘 살펴주세요"
연평도등대 마지막 근무자 김용정 소장 45년만에 다시 찾아
(연평도=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연평도등대에 불이 다시 켜지다니…. 과거로 날아온 것 같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연평도등대의 마지막 근무자인 김용정(89) 전 연평도등대소장은 45년 만에 재점등한 연평도등대를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그는 연평도등대가 마지막으로 불을 밝힌 1974년 당시 이 등대의 소장으로 근무하며 등댓불이 꺼지는 등대의 최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북 간 군사적 대치가 극심했던 시기. 연평도등대의 불빛은 어둠 속 뱃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신호'가 아니라 북한에 군사도발의 빌미를 주는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60년 첫 불을 밝히며 연평도 해역 조기잡이 어선들의 바닷길을 안내해주던 연평도등대는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1974년 소등했다. 연평도등대는 이후 시설물까지 폐쇄되면서 1987년 점등 27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연평도등대는 17일 45년 만에 재점등하며 다시 돌아왔다. 야간 조업시간이 연장되면서 해양수산부가 어선들의 안전항 항해를 위해 연평도등대를 재점등하기로 한 것이다.
김 전 소장은 18일 "24시간 등댓불이 꺼지지 않게 연평도등대를 가꾸고 운영했는데 당시 해운항만청(현 해양수산부)이 등댓불을 끄라고 지시해 매우 아쉬웠다"며 "다시 불을 켠 등대를 보니 내 집에 온 것 같이 기쁘다"며 소감을 밝혔다.
1930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난 그는 뭍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뒤 1960년 교통부 해운국(현 해양수산부)에 입사해 등대를 관리·운영하는 일을 시작했다.
연평도등대를 비롯해 인천지역 등대 7곳을 돌아가며 근무, 30년간 어민들의 뱃길을 밝혔다.
당시 각 등대에는 등대소장 1명과 등대원 3명 등 총 4명이 근무했다.
파고, 풍속, 해상 시야 등 기상정보를 모아 상부에 보고하고 깃발과 전등으로 선박들과 소통하며 운항을 돕는 업무가 주를 이뤘다.
변변한 유선전화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등대 근무는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일한 소통방법은 1∼2달에 1차례 섬에 들어오는 보급선을 통하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전화는 물론 편지 한 통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식수는 빗물을 모아 사용했으며 물자 운반은 지게로 했다. 기상악화로 보급선이 뜨지 못하면 밥도 굶어야 했다.
김 전 소장은 등대 근무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도입했다. 등대 주변에 밭을 개간해 농작물을 재배하며 근무에 필요한 식량 상당 부분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다. 이 운영방식은 전국의 등대로 전파됐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등대에 새마을운동을 도입한 사연은 드라마로 제작돼 TBC(동양방송)에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연평도등대에서 근무한 때를 떠올리면 등대원들과 가족처럼 지낸 것이 생각난다. 당시 등대원들은 현재 모두 세상을 등지고 나만 남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가족과는 이산가족처럼 살았지만, 다행히 4남매 모두 잘 성장해줬다. 모든 공로는 동료와 가족 덕분"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김 전 소장의 소망은 연평도등대가 예전처럼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불을 계속 밝히는 것이다.
그는 "최신기기로 배를 운항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등대는 바닷길을 살피는 마지막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평도등대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등대가 등댓불을 계속 밝힐 수 있도록 정부가 살펴주기를 바란다"며 한동안 연평도등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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