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피라미드 설계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I.M. 페이 별세(종합)
"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지난 60년 건축사 얘기못해"
美국립박물관·홍콩 중국은행·카타르 이슬람박물관 건축…대한제국과도 인연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김승욱 기자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貝聿銘)가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이오 밍 페이가 숨을 거뒀다고 그의 아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건축가 중 한 명인 페이가 별세했다고 전했다.
페이의 건축회사인 '페이 콥 프리드 & 파트너스'는 그의 별세 소식을 확인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본명보다 이니셜인 'I.M. 페이'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동관, 홍콩 중국은행 타워,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등 세계 각지의 랜드마크 설계자로 명성을 떨쳤다.
'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로 불리는 페이는 자신이 설계한 박물관, 호텔, 학교 등에서 '빛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와 추상미를 보여줬다고 로이터가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I.M. 페이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지난 60년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로버트 스턴 전 예일대 건축대학원장의 평을 전했다.
1917년 4월 중국 광저우에서 유명 은행가와 플루트 연주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모친 사망 후 이사한 상하이에서 1930년대 빌딩 붐을 목격하고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
부친은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으나, 페이는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193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각각 받은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공산당의 중국 장악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1948년 뉴욕의 유명 부동산 개발업자 윌리엄 제켄도프의 회사에 취직한 페이는 대규모 도심 재생사업과 다용도 복합시설 건축 등의 실무 경험을 쌓은 뒤 1955년 뉴욕에 자신의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무명 건축가였던 그는 페이 필립 존슨, 미스 반데어로에, 루이스 칸 등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1964년 보스턴 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설계를 수주하면서 유명 인사로 발돋움했다.
이어 1968∼1978년 그가 지휘한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 건축은 미국건축가협회(AIA)가 선정한 미국의 10대 건축물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삼각형과 사다리꼴 등의 기하학적 구조가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이 미술관 건축은 루브르 박물관 리노베이션 사업 수주로 이어졌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보고 감명을 받은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1983년 페이에게 루브르를 맡긴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과 정치권, 언론은 외국인 건축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이 된 21m 높이의 거대 유리 피라미드가 전통적인 프랑스 양식의 기존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분노의 여론도 일었다. 프랑스 르몽드는 그의 작품을 "디즈니랜드 별관"이라고 혹평했다.
이와 관련해 페이는 2008년 NYT 인터뷰에서 "동시대의 건축가들은 뭔가에 현대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시대가 변했고 우리는 진화했다. 하지만 난 그 시작을 잊고 싶지 않다. 오래가는 건축은 뿌리가 있어야 한다"라며 전통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애썼다고 설명했다.
고국으로 눈을 돌린 페이는 중국 베이징 프래그런트 힐 호텔(1979∼1982년)과 홍콩의 중국은행 타워(1982∼1989년) 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3년 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관한 로큰롤 명예의 전당도 대표작 중 하나다. 로큰롤에 관해서라면 비틀스의 이름만 겨우 알던 페이가 명예의 전당 건축을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등 '공부'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페이는 1990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혼자 설계 작업을 하거나 회사에 자문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공식 은퇴 후 설계한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1997년 개관)과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2008년 개관)도 그의 걸작 중 하나다.
9세기 이집트 카이로에 세워진 아흐메드 이븐 툴룬 모스크에서 영감을 얻은 이슬람예술박물관은 모더니즘과 고대 이슬람 건축을 잘 융합했다는 평을 받는다.
페이는 1979년 미 건축가협회(AIA) 금메달을,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을, 1983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1992년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각각 받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프리츠커상과 함께 받은 10만 달러의 상금은 중국 건축학도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에 사용했다.
생전에 그는 대한제국 황실과도 인연을 맺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이오 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구는 이곳에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했다.
왜소한 체격과 부엉이 모양의 둥근 안경 차림으로 유명한 그는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2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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