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의 수행자' 박서보 "발가벗은 채 섰다"(종합)

입력 2019-05-16 17:35
'아흔의 수행자' 박서보 "발가벗은 채 섰다"(종합)

추상화단 거목,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서 전 시기 작업 129점 공개

초기 '원형질' '유전질'과 설치 작품 '허상'도…"권태 모르는 노동자" 평가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여러분에게 나는 뿔 난 도깨비 같은 사람으로 묘사돼 있었을 겁니다. 오늘 아침에 그 뿔을 다 밀어내고 왔습니다. 허허"

16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 도착한 원로 미술가 박서보(88)는 중절모 아래 민머리를 드러내며 농담했다.

박서보는 한국 추상미술 기수였고 교육자이자 행정가, 평론가로도 활약했다. 그는 대작 한 점이 수억 원을 호가하는 단색조 회화의 대표작가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홍익대 사단'을 공고히 한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어느 쪽이든 그가 한국 미술사에 드리운 그늘이 깊고도 넓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18일부터 국내 최고 권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서보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는 까닭이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작가도 이날만큼은 긴장된 모습이었다. "때로는 내가 숨겨두고 싶었던 세계까지도 다 드러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발가벗고 선 입장입니다."



전시는 서구 현대미술이 세차게 밀려드는 가운데 전통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내고자 분투했던 작가의 70여년 여정을 작품 129점과 아카이브를 통해 소개한다.

5개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역순으로 흘러간다.

전시장 들머리에는 작가가 올해 완성한 대작 2점이 걸렸다. 각각 핑크색과 하늘색 바탕에 유백색 물감을 바르고, 다시 연필로 무수히 그었다. 어린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착안, 연필로 수천 번을 긋는 대표작 '묘법'(描法)에 색채를 얹은 시도다.

연로한 가운데 뇌경색까지 덮치면서 조수 도움을 받아 채색 작업을 이어온 작가가 조수를 쓰지 않고 오롯이 혼자 완성한 작품들이다. 신작을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던 작가는 "얼마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것"이라면서 애착을 보였다.



수행에 가까운 '묘법' 진수만을 모아둔 공간도 눈길을 끌지만, 초기 엥포르멜 작업과 1950∼60년대 '원형질', '유전질' 연작, 1970년 전시 이후 처음 재현되는 설치 작품 '허상' 등 작가의 부단한 여정을 보여주는 작업이 흥미롭다.

한국전쟁 직후 그늘진 정서가 담긴 '원형질'이나 서구풍의 기하학적 추상에 전통 오방색을 접목한 '유전질' 연작은 박서보 작업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채롭다.

사람이 빠져나가고 옷만 남은 형태의 인물상 설치인 '허의 공간'은 절친했던 건축가 김수근 제안으로 1970년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에 전시됐던 작업이다. 반정부 성향의 작품이라는 비판에 전시 도중 철거됐다가, 이번 전시를 맞아 반세기 만에 재현됐다.

박영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학예실 내부에서는 박서보 선생님을 두고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는 말이 나왔다"라고 전했다. 이번 전시 제목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고 지은 배경이다.





작가는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그림은 수신을 위한 수행 도구다. 결국 나를 비워내야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이 쉬어갈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를 '스트레스 병동'이라고 칭하면서 "디지털 시대에는 아날로그 시대처럼 이미지를 캔버스에 토해내는 식으로 폭력을 저질러서는 안 되며, 그림이 흡인지가 돼 보는 사람이 불안감을 지우고 안정감을 찾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작가는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는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는 이야기를 이날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빨리 천재 소리를 들으려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다 보면 추락한다"는 말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작가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번 전시는 지난 70년 활동 자료를 통해 세계 무대에 한국 추상미술을 소개하려 애쓴 예술행정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면모도 소개한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박서보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행사가 31일 개최되며 작가와의 대화(7월 5일), 큐레이터 토크(7월 19일)도 예정됐다.

9월 1일까지 열리는 회고전에 맞춰 케이트림 큐레이터가 저술한 책 '박서보'도 마로니에북스에서 출간됐다. 2014년 싱가포르 출판사에서 영문판으로 먼저 나온 책이다.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