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기소 안된 과거사 피해자도 재심 이후 소멸시효 적용"
안기부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가족에 50억 국가배상 판결
"기소된 피해자와 인권유린 차이 없어…기소여부 따라 권리구제 달라지면 부당"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불법 고문 등을 당한 과거사 피해자들 가운데 당시 기소되지 않거나 무죄 판결을 받아 재심을 거치지 않은 경우에도 관련 사건의 '재심 무죄' 판결일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따져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양승태 사법부 시절 대법원이 국가배상 요건을 엄격하게 보면서 내놓은 판례 중 하나를 뒤집은 것이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8부(설범식 부장판사)는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의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박모씨 등 일가족 2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약 5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들 일가족 중 8명은 1981년 안기부에 연행돼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된 친척 A씨와 접선해 간첩 활동을 한 것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길게는 두 달 넘게 영장 없이 불법 구금된 이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고, 이를 근거로 5명이 최대 무기징역의 실형을 확정받았다.
이 사건은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혐의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같은 해 11월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됐다.
이들 일가족은 1년 6개월여가 지난 2011년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소멸시효를 '재심 무죄 확정 이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라고 해석한 판례에 따라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이 판례는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해석이 위헌적이라고 결정하면서 뒤집어졌다. 헌재는 피해자들이 재심판결 확정을 안 날부터 3년 이내에 국가배상을 청구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봤다. 이 결정을 근거로 재심 재판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재심 전 대법원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하면서 기소되지 않은 3명의 소멸시효는 재심 무죄 판결과도 무관하다고 판단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 대법원은 "세 사람은 과거사위에 진실규명신청을 하지도 않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적도 없다"며 "다른 가족들의 재심 무죄가 확정된 시기까지 손해배상 청구를 기대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이나 재심을 거치지 않았고, 그 사이 객관적 장애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없다면 사실상 석방된 날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재심 재판부는 "3명에 대한 소멸시효도 다른 피해자들의 재심 무죄 확정일부터 계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를 뒤집었다.
재판부는 "3명에 대한 감금과 고문 등 불법행위는 반민주적 인권유린이라는 점에서 다른 피해자들과 실질적 차이가 없다"며 "3명을 고문해 얻은 증거가 다른 피해자들의 유죄 판결에 직접적 관련이 있으므로 재심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독자적으로 위법수사를 주장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만약 3명이 기소됐다면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재심을 거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기소나 유죄 선고 여부에 따라 손해배상 여부가 결정된다면 동일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검사의 불기소라는 우연한 사정에 따라 권리 구제 여부가 달라지는 결과가 발생해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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