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서 추방된 日 참여시인 유작 '흙담에 그리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1921년 식민지 조선. 20대 중반 '문청' 우치노 겐지는 철도 개발 중심지 대전으로 넘어와 중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1년 뒤 문학 모임을 결성하고 시 전문잡지 '경인'을 창간한다. 억눌림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며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우치노는 1923년 2년간 문학 활동을 결산하는 첫 시집 '흙담에 그리다'를 발표하는데, 일본어와 조선말을 함께 쓰면서 조선 풍광을 모더니즘적으로 표현해 주목받았다.
문제는 시집 제목과 같은 장편 표제시 '흙담에 그리다'였다. 좌파 프롤레타리아 문학(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참여 경향문학)에 심취한 그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조선의 풍광에 연결한 시어로 표현한다. 단순히 핍박과 고난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성과 행동을 촉구했다.
당연히 이 시는 문화 통치를 가속하던 조선총독부의 심기를 정면으로 자극했다. 총독부는 시집 발간을 금지하고 '흙담에 그리다'를 책에서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겐지의 저항 정신을 더욱 부추겼다. 경성을 거점으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문인들과도 교류하며 잡지 발간, 문예 결사 결성, 전시회 개최 등 여러 방면에서 보폭을 넓힌다.
결국 총독부는 1928년 서른이 된 우치노를 교사직에서 파면해 곧장 조선에서 추방한다. 도쿄로 거처를 옮긴 그는 오히려 더욱 날을 세운 시를 발표한다. 두 번째 시집 제목은 아예 조선어 '까치'로 짓고 아라이 데쓰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강화한다.
권력은 쥔 자들은 이런 반항아를 놔두지 않는다. 일제는 우치노를 불순분자, 위험분자로 분류해 체포, 구금, 고문 등으로 박해했다.
향토문학적 기조에서 탐미적 모더니즘과 참여문학이 버무려진 첫 시집 '흙담에 그리다'는 생각의 틀인 시어마저 일본어와 조선어가 뒤섞여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낸다.
'이윽고 짓밟히고 학대당하다/ 결국에는 살아남지 못하는 가로수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 아니겠는가// (중략) 우리 마음의 아궁이에는/ 억누를 수 없는 저주의 장작이 타서/ 지금 바로 분방하게 아궁이의 불길을 당기려한다//' ('흙담에 그리다' 중 '어둠의 곡' 일부)
'하지만, 하지만/ 총검에 보복하려 총검을 든다 한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가?/ 백년하청을 기다린다는 속담을 모르는가/ 파괴, 파괴, 파괴가 있을 뿐/ 무한한 저주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 하늘도 찢고, 땅도 무너뜨려라/ 천지간에 있는 모든 것을 불어 날려라'('흙담에 그리다' 중 '꿈의 곡' 일부)
도서출판 '필요한책'이 펴낸 시집 '흙담에 그리다'의 표제시는 이처럼 '서곡-어둠의 곡-꿈의 곡-새벽의 곡' 네 편의 시를 엮은 장편시다. 조선인의 억눌림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려내면서 행동과 참여, 단결을 노래했다.
엄인경 옮김. 183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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