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산불 한달] ③ 경찰 수사 어디까지…한전 과실 밝혀낼까
배상 책임 놓고 늘어지는 민·형사 소송에 두 번 우는 산불 피해자
실화자 검거 10건 중 4건 불과…'원인 미상' 산불이 느는 이유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축구장 면적 3천966개의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어 피해액만 1천291억원에 달하는 강원 5개 시·군 산불의 원인 규명을 위한 수사는 어디까지 왔을까.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강원지방경찰청은 고성·속초산불은 한국전력의 업무상 실화, 인제와 강릉·동해산불은 주민의 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초 발화 추정 장소에서 수거한 증거물 등의 정밀 감정 결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통보받은 경찰은 관련자를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찰의 수사가 막바지에 달하면서 산불 책임에 대한 윤곽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업무상 실화 또는 실화 혐의를 둘러싼 입증 여부와 이를 둘러싼 민·형사 소송이 장기화할 것으로 보여 검게 그을린 산불피해 주민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전망이다.
◇ 한전의 업무상 과실 여부가 쟁점…인제와 강릉·동해산불 실화 가능성
발화 원인이 어느 정도 드러난 고성·속초산불은 한전의 과실 여부가 경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지가 관건이다.
지난달 4일 오후 7시 17분께 시작된 이 산불의 최초 발화 지점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도로변 전신주 개폐기로 지목됐다.
경찰은 고성·속초산불의 경우 전신주 특고압 전선이 바람에 떨어져 나가면서 발생한 '아크 불티'가 발화 원인으로 추정된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
한전이 관리하는 전신주의 개폐기 인입선(리드선)이 바람에 의한 진동 등 반복된 굽힘 하중 작용으로 절단돼 떨어지면서 강한 불꽃을 발생시켰고, 이 불티가 마른 낙엽과 풀 등에 붙어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06년 설치된 개폐기는 전신주에 달린 일종의 차단기로, 한전이 관리하는 시설이다.
경찰은 13년 전 설치한 전신주 개폐기의 교체 주기와 유지·보수 과정에서 한전 측의 업무상 과실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지난달 23일 한전 속초지사와 강릉지사 2곳을 압수수색했다.
이어 전신주 개폐기 등의 설비를 유지·관리하는 한전과 하도급 업체 관계자 10여 명을 참고인 등으로 소환해 조사 중이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업무상 과실이 드러나면 참고인을 피의자로 전환할 방침이다.
1천260㏊를 태운 강릉·동해산불의 최초 발화 지점은 마을 주민이 기도를 드리는 신당과 인근 야산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신당에서 수거한 전기 시설 등에 대한 국과수 정밀 감정 결과를 토대로 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지난달 4일 오후 2시 45분께 발생한 인제산불도 남면 남전약수터 인근에서 불이 난 것으로 보고 방범용 CCTV 분석을 통해 실화 용의자를 파악 중이다.
◇ 배상 책임 놓고 늘어지는 민·형사 소송에 두 번 우는 산불 피해자
산불 원인에 대한 경찰 수사가 일단락되더라도 피해액과 복구비를 합해 3천144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책임 범위를 다투는 민·형사 소송은 짧게는 1년, 길게는 수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2004년 속초 청대산 산불의 경우 한전의 고압선 불꽃 발화를 둘러싼 형사적 책임 공방으로 1년 6개월간 주민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나마 한전은 이번 고성·속초 산불의 형사적 책임이 없더라도 민사적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터라 청대산 산불과 같은 갈등과 지루한 공방은 피할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과거 산불과 관련한 민·형사 소송을 보더라도 적지 않은 시일의 소요는 불가피해 보인다.
2015년 2월 8일 발생해 산림 52㏊를 잿더미로 만든 삼척 가곡면 산불은 화목 보일러 연통에서 불씨가 튀어 번졌다. 당시 불을 낸 실화자가 검거돼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는 등 형사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 배상을 둘러싼 민사 소송은 4년째 끝나지 않았다. 민사 1심에서 일부 패소한 산불 실화자가 항소심을 제기해 법정 공방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7년 3월 9일 244㏊의 산림을 태운 강릉 옥계 산불은 담뱃불 실화로 결론이 나 60대 2명이 각 징역 1년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받았다.
형사 처분은 끝났지만 피해 배상을 둘러싼 민사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28일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에서 전선 단락으로 추정되는 산불이 나 357㏊의 산림이 불에 탔지만, 형사재판조차 열리지 않은 상태다.
◇ 산불 수사 이대로 좋은가…10건 중 4건 검거에 그쳐
났다 하면 대형산불로 이어지는 특성을 지닌 동해안 산불은 원인 제공자 검거와 처벌을 통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그러나 동해안 지역 산불 수사를 전담하는 산림청 내 상시 조직과 인력은 전무하고, 지자체 산림 분야 특별사법경찰관리(특사경)의 산불 수사 전문성도 크게 떨어지다 보니 '원인 미상'으로 흐지부지 처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2일 산림청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은 4천316건으로 이 중 1천792건의 산불 원인 제공자(가해자)를 검거했다.
41.5%에 불과한 산불 원인 제공자 검거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림청은 본청과 북부·동부·남부·중부·서부 등 5개 지방청에 292명으로 구성된 '산림 사범수사대'를 편성·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직은 말 그대로 전담 인원을 지정만 해 둔 비 상시기구에 불과하다.
도와 18개 시·군에도 193명의 산림 분야 특사경이 있지만, 산불 수사는 사실상 경찰 등 수사기관에 의존한다.
도내 지자체 관계자는 "산림 보호와 조림, 산지 내 불법 행위 등의 업무에 주력하다 보니 소규모 산불 수사까지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며 "지자체 특사경에게 산불 수사 전문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대양 관동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산불 원인 제공자 검거를 통한 엄한 처벌은 경각심 차원에서 또 다른 산불 예방 효과를 줄 수 있다"며 "대형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동해안 지역에는 산불 등 산림 수사 전문 조직의 상시 운영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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