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보건당국, 청소년 HIV 감염시켜놓고 수년간 '쉬쉬'

입력 2019-04-29 16:52
英 보건당국, 청소년 HIV 감염시켜놓고 수년간 '쉬쉬'

1970~80년대 '수혈 감염 스캔들' 피해자 HIV 감염 사실 숨겨

더타임스 "진상조사 몇년간 지속…전직 보건장관 등 소환될 듯"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산하 병원이 1980년대 10대 청소년에게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감염시켜놓고 비밀로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당시 청소년은 이제 50세가 된 마틴 비어드 씨다.

그는 영국의 공공 의료서비스인 NHS 역사상 최악의 의료재앙으로 꼽히는 '수혈 감염 스캔들' 피해자 중 한 명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발생한 수혈 감염 스캔들로 약 2만5천명이 HIV와 C형 간염에 걸렸고, 2천4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비어드 씨는 HIV 감염 당시 기적의 약으로 불리던 '팩터Ⅷ'으로 치료를 받던 수천 명의 혈우병 환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약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 대부분은 몇 년 후 HIV나 C형 간염, 혹은 둘 다에 걸렸다.

이 약은 미국의 수형자와 약물 중독자를 포함해 수천 명이 제공한 혈액의 혈장으로 제조됐는데 제공 혈액 중 하나라도 감염이 되면 모두가 감염되는 구조였다.

비어드 씨는 어린 시절부터 버밍햄 어린이병원(BCH)에서 치료를 받다가 17세에 노스스태퍼드셔 병원으로 옮겼고, 1986년 9월 이 병원에서 HIV 감염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당시 노스스태퍼드셔 병원의 의사는 비어드 씨에게 "당신은 HIV 양성"이라며 살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어드 씨는 "나는 충격을 받았고 믿을 수 없어 망연자실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처음 HIV 진단을 듣기 1년 전에 레스터 왕립병원에서도 치료를 받았다.

더타임스가 입수한 레스터 왕립병원 전문의(consultant)가 버밍햄 어린이병원 전문의(registrar)에게 보낸 1985년 11월 편지에는 "그는(비어드 씨) HIV 양성인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당신도 그 사실이 그에게 누설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뜻에 따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레스터 왕립병원은 비어드 씨의 HIV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버밍햄 어린이병원의 전문의도 1989년 비어드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1983년에 저장된 샘플로 1985년에 실험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비어드 씨는 당시 HIV 양성이었다고 적었다.

비어드 씨가 1986년 처음으로 HIV 진단을 듣기 1년여 전에 보건당국은 이미 그의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비어드 씨는 그의 상태 때문에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혈우병 공동체(Haemophilia Society)의 클라이브 스미스 씨는 "비어드 씨가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며 "우리는 (HIV) 진단을 듣지 못해 그들의 배우자에게 감염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결과는 끔찍하다"고 말했다.

레스터 NHS 지부의 대학병원 측은 "3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과 관계없이 우리는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버밍햄의 여성·어린이 NHS 재단 측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혈 감염 스캔들 조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하면서 전직 보건장관과 고위급 의료진들이 소환될 것으로 보인다고 더타임스는 전망했다.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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