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이 러시아어로 옮긴 이순신 '장계' 32년만에 출간
한국학 연구자 피로젠코 씨, 황동민이 남긴 원고 마무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러시아에서 활동한 고려인 학자인 인노켄치 이바노비치 황(한국명 황동민·1912∼1985)이 생전에 러시아어로 번역한 충무공 이순신 장계(狀啓)가 사후 32년 만인 2017년 여름 출간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인노켄치 황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대학 공부를 마쳤고, 1945년부터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그가 이순신 저작물을 러시아어로 옮겼다는 사실은 한국학계에 전해졌으나, 서적이 출판되지는 않았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한 한국학 연구자 올레그 피로젠코(41) 씨는 충무공 탄신일인 28일 연합뉴스와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러시아 '동양문학출판사'로부터 인노켄치 황의 번역 원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업을 마무리해 2년 전 총 3권으로 간행했다"고 밝혔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피로젠코 씨는 "황동민 선생의 원고는 타자기로 러시아어를 입력한 뒤 한자와 일본어는 손으로 쓴 상태였다"며 "모든 페이지를 촬영한 뒤 한자, 일본어를 다시 러시아어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자사전도 없고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황동민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새삼 느꼈다"며 "귀중한 문헌이 러시아에 반드시 소개돼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노켄치 황이 완성한 원고 중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10∼15% 정도는 추가로 번역하고, 편집과 각주 작업에 참여했다.
'장계'는 왕명을 받고 지방에 간 신하가 쓴 보고서인데,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작성한 장계 초안이 '임진장초'(壬辰狀草)로 전한다.
피로젠코 씨는 "공식 문서인 장계는 조선시대 정치·군사 제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중요하고,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의 인격과 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며 "두 문헌을 서로 비교하면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이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황동민 선생은 상트페테르부르크박물관에 있는 충무공 전서를 참조한 것 같고, 저는 인터넷으로 글을 봤다"며 "황동민 선생의 러시아어 스타일에 맞게 글을 쓰려고 했다"고 전했다.
서적 출간은 전러시아고려인연합회가 지원해 이뤄졌다. 모두 450권을 인쇄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서점에 배포됐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피로젠코 씨는 말했다.
모스크바국립종합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피로젠코 씨는 지난해 10월 러시아 외교부와 계약이 끝나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인노켄치 황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거듭 나타냈다. 아울러 충무공의 위대함도 역설했다.
"이순신 장군이 장계를 쓸 때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물론 공을 세운 사람을 세밀하게 파악한 것 같습니다. 잔혹한 전쟁터에서 인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인 충무공은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인간 존중, 생활관 측면에서 몇 세기를 추월했다고 평가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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