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맏아들이자 '정치적 동지'…아버지와 함께 한 '민주화 역정'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DJ 외곽조직 '연청' 결성 이끌어
내란음모사건 고문 후유증에도 15∼17대 국회서 활발한 의정활동
2006년 의원직 상실 이후 파킨슨병 악화…2009년 DJ 서거 때 임종 지켜
(서울=연합뉴스) 차지연 기자 = 20일 향년 71세로 별세한 김홍일 전 의원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장남으로, 민주화를 향한 아버지의 길을 따르며 정치권에 발자국을 남겼다.
194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김 전 의원은 아버지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함께하며 자신도 각종 풍파를 겪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에는 공안당국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고문 수사관들은 김 전 의원을 '빨갱이 새끼'로 부르며 "네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며 심한 구타를 퍼부었다.
김 전 의원은 고문 도중 허위 자백을 할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목을 다치기도 했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은 평생 김 전 의원을 괴롭혔고, 결국 파킨슨병으로 이어져 고된 투병 끝 별세의 원인이 됐다.
김 전 의원은 1980년 김 전 대통령의 외곽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결성을 이끌며 아버지를 지원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전남 목포·신안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돼 국회에 첫 입성했다. 목포는 아버지 김 전 대통령의 6·7대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이기도 하다.
김 전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전남 목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재선에 성공했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3선 고지에 올랐다.
김 전 의원은 3선 의원으로 활동하는 내내 'DJ 아들', '김심(金心) 계승자'로서 주목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탓에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으나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2006년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대가로 금품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의원직 상실 후에는 병세가 악화하면서 투병에 집중했다.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때에는 거의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임종 순간에 "아버지" 세 글자만을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는 몰라보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charg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