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덩치에 맥주 좋아하는 중년 여형사를 만나다
애거사를 잇는 영국 여성추리작가 클리브스의 '나방 사냥꾼'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영국 여인들에겐 추리작가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잇는 현역 최고 여성 추리작가로 꼽히는 앤 클리브스(65) 역시 영국인이다.
시즌 9를 끝내고 내년에 시즌 10 방영을 준비 중인 영국 iTV 인기 범죄 드라마 '베라', 최근 시즌 5를 마친 BBC One 범죄극 '셰틀랜드' 모두 원작자가 클리브스다.
30여년간 30여 편 범죄소설을 펴내며 베스트셀러 추리 소설가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그는 2017년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주는 '다이아몬드 대거상'(평생공로상)도 받았다.
소설 '나방 사냥꾼'(구픽 펴냄)은 여형사 베라 스탠호프 활약상을 그린 8편 연작소설 중 2015년 발표한 제7편이다. '베라' 시리즈에서는 시즌 6의 에피소드로 각색됐다.
캐릭터 창조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클리브스는 베라 시리즈를 통해 추리물 역사상 길이 남을 주인공 베라를 탄생시켰다.
큰 덩치와 펑퍼짐한 몸매에 불친절하고 냉소적이며, 맥주와 음식을 좋아하는 중년 미혼 여성. 강력반 형사와는 거리감을 주는 캐릭터다.
그러나 소설에서 베라는 타고난 통찰력과 수사력, 사냥개처럼 날카로운 감각과 끈질김으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고 주변 남성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이 합쳐질 때 독자에게 주는 낯섦과 미묘한 충격이 베라를 더욱 매력 있게 만든다.
게다가 가끔 풍겨 나오는 특유의 온정은 캐릭터를 더욱 풍요롭고 인간적으로 채워준다.
앤 클리브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범죄소설에서 강하고 그럴듯한 여주인공이 드물다는 걸 깨달았다"며 "현실적이고 진짜 살아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를 원했기에 베라를 만들었다"고 했다.
소설은 아름답고 고요한 영국 노섬벌랜드 한 계곡에서 젊은 남자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피해자 신원은 '하우스 시터' 패트릭 랜들. 그러나 베라가 랜들 거주지를 찾아가자 또 하나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두 번째 피해자는 컴퓨터 전문가 마틴 벤튼이었다.
베라는 동물적 감각으로 두 피해자가 모두 나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또 '은퇴한 쾌락주의자'란 이름의 모임에 속한 비밀스러운 세 은퇴자 부부가 어떤 식이든 이 사건과 연관돼 있을 것으로 직감한다.
이 소설에도 클리브스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거대 권력의 음모나 방대한 스케일의 범죄 조직을 등장시키기보다 작은 사회 안에서 얽히고설킨 마을 사람들의 관계와 심리적 갈등을 치밀하고도 박진감 있게 드러내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섬세한 묘사를 통해 서서히 뼈대에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독자들이 마치 베라와 함께 수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는 정통 미스터리를 추구한 애거사의 후예다운 모습이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모든 장면이 날카롭게 관찰된 디테일로 가득 차 독자에게 선명하게 전달되는 소설"이라고 평했다. 유소영 옮김. 380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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