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곳] 빛과 얼음의 땅, 북극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이 땅은 완전무결한 영속을 느끼게 한다. 적대적이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고요하고 온전하게 이곳에 있을 뿐이다./ 몹시 쓸쓸하지만, 아무런 인간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을 이해하고 그 안에 깃들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 에드먼드 카펜터
영화 '아틱'(Arctic)에서 북극은 잔혹하다. 비행기 사고로 조난된 한 남자가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이지만, 북극의 대자연은 쉽게 이 남자의 살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오로지 끝도 없이 대지를 뒤덮은 눈과 얼음뿐. 인간의 흔적은 없다.
자신을 구하러 온 헬기가 추락하고 그 속에서 부상한 생존자를 발견하지만, 생존 여성은 그에게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는 상황. 남자는 '함께 살기'를 위해 거동이 힘든 여성을 썰매에 태우고 지도 한장에 의지한 채 구조의 손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 북극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북극의 정의는 다양하다. 지리학자들은 소위 '북극선'이라고 부르는 북위 66.5도 위쪽을 북극이라고 부른다. 기후학자들에게 북극이란 북위도에서 '7월 평균 최고 기온이 10도 이내'인 지역이다. 생물학자들은 나무의 북방 한계선(treeline) 이북을 북극으로 여긴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극이 어디냐고 물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드문 건 당연하다.
이는 남극도 마찬가지인데, 적도부터 북위 80도 부근까지 육지가 이어져 있는 북반구와 달리 바다가 대부분인 남반구는 북반구처럼 삼림한계나 평균기온 등으로 남극을 정의할 수가 없다.
이에 비해 북위 90도인 북극점과 남위 90도인 남극점의 위치는 분명하다. 지구상에 딱 한 곳씩밖에 없다.
북극점에선 어느 방향을 향해도 전부 남쪽이고, 남극점에선 사방이 모두 북쪽이다. 두 곳은 지리적으로 북쪽 또는 남쪽밖에 없는 특이한 지점이다.
하지만 극점에서 한 걸음만 움직여도 그곳에는 동서남북이 있다.
영화 '아틱'은 100%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했다. 아이슬란드는 북위 63.24∼66.33도에 걸쳐 위치한 화산섬으로 섬 북단에 북극선이 지나가고 있어 지리적으로 섬의 대부분은 북극권 밖이지만, 겨울에는 북극과 가장 비슷한 자연 풍광을 스크린에서 재현해 낼 수 있는 곳이어서 촬영 장소로 선택됐다.
◇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은
고위도의 극 지역이 저위도보다 추운 이유는 태양의 복사량이 적은 것도 있지만, 눈과 얼음이 많은 게 더 큰 이유다. 눈과 얼음이 태양 복사를 반사해 지표면에 열이 축적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균 두께 2천m가 넘는 얼음대륙으로 태양 복사의 반사율이 높은 남극이 해수가 많은 북극보다 더 춥다. 남극은 표고도 북극보다 높아 평균기온이 더 낮을 수밖에 없다.
관측점이 있는 곳만 비교했을 때 역대 최저 기온은 남극 보스토크 기지에서 관측된 영하 89.2도다.
인간이 거주하는 곳 중에서는 시베리아 오이먀콘의 수은주가 영하 77.8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인구가 500명인 오이먀콘은 1월 평균기온이 영하 51도인데 영하 52도 아래로 내려가야 모든 학교가 휴교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난 1월 영하 52도의 기온 속에 5개국에서 20여명이 참가한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최저 기온은 별 차이가 없지만, 연평균 기온은 남극 쪽이 훨씬 낮다. 보스토크 기지는 연평균 기온이 영하 55도인데 비해 오이먀콘 이전에 가장 최저 기온 기록을 가지고 있던 베르호얀스크는 영하 16도다.
◇ '빙산의 일각'
북극 바다에는 얼음 덩어리인 빙산이 떠 있다. 원래 육지에 있던 빙산이 밀려 나와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빙산의 크기는 다양하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보통 수면에서의 높이가 5m 이상인 것을 빙산이라고 부르는 데 길이 100㎞에 이르는 거대한 빙산도 있다.
빙산의 7∼30%는 공기로 채워져 있는데 얼음과의 밀도 차이로 인해 전체 빙산 중 수면 위에 노출된 것은 7분의 1 정도이며, 나머지는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에는 과학적 진실이 담겨 있는 셈이다.
빙산에 부딪히면 강철로 만든 배라도 부서진다. 따라서 항해 중에 수면 위에 떠 있는 작은 빙산을 발견했다면 그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얼음이 수면 아래 숨어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극지방은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 새로 내린 눈이 오래된 눈 위에 쌓이면 아래쪽 눈은 위쪽 눈의 무게로 단단해져 얼음으로 바뀐다.
눈이 얼음으로 변할 때 공기가 얼음 속에 갇히게 되는데, 이 때문에 깊은 곳의 얼음 속에는 그 기원이 되는 눈이 내렸던 시대의 공기가 포함돼 있다.
극지방에 채굴한 얼음 덩어리는 결국 태고부터 현재까지 눈과 공기가 시대순으로 냉동 보존된 귀중한 타임캡슐이 된다.
세계 각국이 남극 빙상을 굴착해 분석한 결과, 2천503m 깊이의 얼음이 약 32만년 전에 내린 눈이 얼음으로 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과거 32만 년 동안 지구상의 기후와 환경이 변해온 모습도 밝혀졌다.
◇ 북극은 죽음의 땅이 아니다
북극은 얼핏 눈과 얼음밖에 없는 공허한 동토로 보이지만, 사실은 무려 2만1천여 종에 달하는 생물들이 살고 있다.
지상 최대의 육식 동물인 북극곰이 2만 마리 이상 서식하고 있고, 279종에 달하는 철새 수백만 마리가 짧은 여름 북극에서 번식한다.
7월에는 다년생 식물의 꽃도 피고 곤충류도 번식하며,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에는 모기도 있다.
대형 초식동물인 사향소, 야생 순록인 카리부, 1천㎞ 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며 사는 북극여우가 있고, 바다에는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고래가 서식한다.
북극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북극곰은 시속 40㎞로 달릴 수 있고, 시속 10㎞로 하루종일 헤엄칠 수 있다. 12㎝ 두께의 피하지방이 있어 영하 35도 이하의 기온에서도 정상 체온을 유지하는데 극한의 추위에서도 뛰면 곧바로 체온이 오른다.
사향소는 많게는 100마리 정도까지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매머드가 살아 있던 무렵부터 빙하기를 거쳐 살아남았다. 60만 년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결과 영하 40도 추위도 견디는 가늘고 긴 섬유질 솜털이 발달해 있다고 한다.
◇ 지구의 에어컨이 고장 나면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라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그런데 그 변화는 치명적이어서 거꾸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기후 변화로 북극의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북극의 환경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북극 바다에 떠 있는 해빙은 바다의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대기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일종의 절연체 역할을 한다. 결국 얼음이 녹으면 북극의 기후는 급속히 높아지게 된다.
북극의 얼음은 또 대기에 유입되는 수분의 양을 제한하고 있는데 해빙이 사라지면 폭풍을 막아주는 장벽이 사라져 초대형 폭풍이 잦아지게 된다. 폭풍우와 폭설 등 지구촌의 이상기후가 그 결과물이다.
지난 30년 사이 북극에선 여름철 해빙의 75%가 사라졌다. 이대로 가면 2030년대에는 빙하가 없는 북극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북극곰은 어떻게 될까. 먹이를 찾아 이동해야 하는 북극곰은 바다에 떠 있는 해빙이 적어질수록 헤엄치는 시간이 길어져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굶어 죽는 개체가 늘어날 수 있다.
기후 변화에 적응해 개체 수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북극해가 북극곰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게 주장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들은 흰색을 가리키는 용어만 마흔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곰의 흰 털과 눈의 색을 구별하고 빙하의 다양한 흰색도 구분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들은 북극이라는 대자연에 스며들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후 변화는 문명과 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야망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영화 '아틱'의 주인공이 놓인 생사의 갈림길은 인류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함께 살기'는 미래에 인간이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인간의 흔적이 없는 곳,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의 대자연은 오늘도 말이 없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선 에스키모들처럼 그 말 없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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