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핵심협약 비준' 합의 난망…'비준 후 법개정' 쟁점화
공익위원안에 노사 모두 반발…국회로 공 넘어가도 합의 어려워
文정부 국정과제 물 건너갈 가능성…노동계, 선 비준 요구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공익위원들이 15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논의를 촉진하기 위해 경영계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권고안을 내놨다.
하지만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 반발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한 사회적 합의 도출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런 상황이 되자 노동계를 중심으로 ILO 핵심협약의 '선(先) 비준'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가 이날 발표한 공익위원안은 현행 최장 2년인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할 것을 권고했다.
현행 제도에서 통상적으로 단체협약은 2년, 임금협약은 1년을 단위로 체결되는데 유효기간이 짧아 교섭 비용이 많이 들고 임금 인상이 가팔라져 경영 부담이 크다고 경영계는 주장한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은 과거 최장 3년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는 만큼, 논의할 여지가 있다는 게 공익위원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연장하면 상황 변화에 대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자의 교섭권과 쟁의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공익위원안은 파업에 들어간 노조의 사업장 점거에 대해서도 조업 방해 가능성 등을 거론하며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비할 것"을 권고했다.
현행 노동조합법은 '생산 기타 주요 업무에 관련되는 시설'을 포함한 일부 시설의 점거를 금지하지만, 포괄적으로 금지하지는 않는다. 대법원의 1990년 판례도 '부분적·병존적 점거'는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경영계는 부분적 점거를 하더라도 업무 연계로 사실상 조업이 전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 손실이 막대하다며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노동계는 대법원 판례가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한다며 경영계 요구는 업무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하는 쟁의행위의 본질적 성격을 무시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공익위원안은 경영계의 핵심 요구인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과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처벌 폐지는 수용하지 않았다.
공익위원안은 대체근로 허용에 대해 "파업의 실효성을 저해해 단체행동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위헌 소지가 있고 국제노동기준 위반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사용자는 쟁의행위로 업무가 중단될 경우 '당해 사업과 관계없는 자'를 투입할 수 없고 업무를 하도급할 수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쟁의행위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공익위원안은 부당노동행위 처벌 폐지 요구는 당장 수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업무방해죄를 포함해 노동관계법의 처벌 규정을 전체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며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노동계는 대기업의 '노조파괴 공작' 사례에서 보듯 사용자 부당노동행위가 아직도 심각한 상황에서 처벌을 폐지하면 부당노동행위가 만연할 것으로 우려한다.
경영계는 공익위원안에 핵심 요구가 빠졌다며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이날 입장문에서 "(공익위원안을) 실체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노사 간 입장을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경총은 "단결권 확대와 관련한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경영계가 생산 활동 방어 기본권 차원에서 요구한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 제도 개선과 반드시 연계해 해결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공익위원안에 반발하기는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사용자단체의 요구 사항을 일부 수용한 것은 명백히 현 제도를 후퇴시키는 내용"이라며 "공익위원안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익위원안은 노사관계 개선위 소속 노사정 추천 공익위원 7명이 합의한 것이다. 이 중 정부 추천 위원은 4명, 노동계 추천 위원은 2명, 경영계 추천 위원은 1명이다. 경영계 추천 위원도 당초 2명이었으나 1명이 지난 1월 말 사퇴했다.
공익위원안은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의 동의를 받지는 않아 사회적 합의로 볼 수 없다.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노사정 대표급이나 부대표급 협상이 시작될 수 있지만, 노사의 입장 차이가 커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사노위가 논의 결과를 국회에 제출할 수도 있지만, 국회에서 여야의 합의를 기대하기는 더 어려울 전망이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은 ILO 핵심협약 비준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지지부진하고 국회의 정치적 합의도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노동계를 중심으로 ILO 핵심협약부터 비준하고 노동관계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이른바 '선 비준 후 입법'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
정부가 노동관계법 개정은 일단 미루고 ILO 핵심협약 비준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 다음, 1년 안으로 법 개정을 하면 된다고 노동계는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관계법을 그대로 둔 채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위헌 논란이 일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정부가 야당과 경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ILO 핵심협약 비준에 나설 경우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노사관계 개선위 공익위원들도 이날 선 비준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보였다.
노동계 추천을 받은 박은정 위원은 사견을 전제로 "정부가 충분한 대안으로 정부 안을 마련하거나 법안을 제출하면서 국회 동의를 요구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라며 사실상 선 비준론에 힘을 실었다.
이에 경영계 추천을 받은 김희성 위원은 선 비준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선 입법 절차를 거치고 국회 동의가 이뤄져야 절차적 정의가 이뤄진다"고 반박했다.
선 비준 카드마저 무산될 경우 현 정부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이 물 건너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ILO는 올해 100주년을 맞아 오는 6월 열리는 총회 초대장을 문 대통령에게 보낸 상태다.
그 전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마무리하고 문 대통령이 총회에 참석해 연설할 경우 한국이 '노동권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상징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집권 초기 ILO 핵심협약 비준을 주도적으로 적극 추진하지 않고 사회적 대화에 맡긴 게 결과적으로 '악수'(惡手)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제노동기준을 따르는 문제로, 정부가 책임 있게 추진하는 게 맞는데도 경사노위에 넘긴 탓에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가 난항을 겪는 동안 정부는 경제위기론을 내세운 보수 진영의 공세에 밀려 ILO 핵심협약 비준과 같은 개혁을 힘있게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ljglor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