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호른바흐 당했다'…獨사회의 '아시아인 차별' 인식은
韓日 측 항의 속에서도 호른바흐, 아시아 여성비하 광고 계속
"아시아인 차별에 대한 인식 부족…용인하면 더 큰 차별 유발" 지적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해시태그 운동인 '#Ich_wurde_geHORNBACHt'(나는 호른바흐 당했다)가 계속되고 있다.
독일에서 아시아 여성 비하 및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광고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달 말 시작된 운동이다.
독일의 DIY 기업인 호른바흐(HORNHACH)가 지난달 중순 제작한 광고가 대상이다.
독일에서 한국 교민들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3주째 비판과 항의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호른바흐는 인종차별 의도가 없다면서 광고를 여전히 내보내고 있다.
독일 언론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지는 등 독일 사회에 알려지고 있지만, 들끓고 있는 아시아계 사회 및 한국 내 여론과는 온도 차가 크다.
아시아인 차별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서명운동·1인시위 전개…韓·日 대사관도 항의 서한
13일(현지시간) 베를린 호른바흐 매장에서는 논란이 된 광고가 버젓이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왔다.
호른바흐가 지난달 중순부터 캠페인을 시작한 영상 광고는 정원에서 땀 흘려 일한 중장년 백인 남성들의 속옷이 진공포장돼 도시의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는 내용이다.
자판기에서 속옷을 구매한 아시아 젊은 여성이 속옷의 냄새를 맡으면서 신음 소리를 내고 황홀해 하는 장면으로 광고는 끝난다.
광고에서는 여성이 황홀해 하는 순간 독일어로 "이게 봄 내음이지"라고 자막이 뜬다.
독일에서는 일본 여성들이 입던 속옷이 일본 도시의 자판기에서 판매된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이를 광고의 소재로 활용한 것이다. 광고 속 진공포장 상품이 흐르는 컨베이어 벨트에는 일본어가 등장한다. 사실상 일본의 도시를 상징화한 셈이다.
이에 한국 교민을 중심으로 아시아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성적 대상화와 인종차별 광고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독일의 청원 사이트에서는 광고를 삭제해야 한다는 청원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까지 3만7천여 명이 서명했다.
한국 교민들은 지난 6일에 이어 이날도 베를린의 호른바흐 매장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주독 일본대사관은 호른바흐에 서한을 보내 항의했다.
주독 한국대사관도 아시아인에 대한 전체적인 차별 문제로 보고 주독 한국문화원장 명의로 호른바흐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한국대사관은 홈페이지에 "광고가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도 내용이 특정 인종이나 여성에게 혐오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서한을 보낸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호른바흐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도시의 삶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라며 대응했다.
호른바흐는 공개적으로 '열린 대화'를 진행했으나, 비판 운동을 주도한 쾰른대 매체문화학 박사과정에 있는 강성운 씨 등 한국 유학생들은 공개적으로 대화를 거부했다.
호른바흐가 사과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대화에 나선 모습 자체가 호른바흐 측의 언론 플레이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런 탓인지 '열린 대화'에는 단지 3명이 참여했다. 한국 유학생들의 우려대로 일부 독일 경제지는 호른바흐에 우호적인 기사를 실었다.
최근 호른바흐는 페이스북 페이지 등에 다른 광고 영상을 올렸지만, 논란이 된 광고는 여전히 남겨뒀다.
호른바흐의 유튜브 계정에는 아직 논란이 된 광고가 버젓이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 "반인종주의 문제, 반유대주의의 문제로 협소하게 인식"
이번 광고 논란은 아시아인 차별 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의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광고에 대해 인종차별 논란이 상당히 벌어졌는데도, 호른바흐가 광고를 내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독일에서 아시아계가 소수라는 점이 꼽힌다.
독일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한강현 씨는 "아시아계가 상당히 뿌리를 내린 미국에서는 기업이 이렇게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는 광고가 나올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한 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이런 광고가 나올 경우 미국 전역의 아시아인 학생단체와 기관이 단결해 반발하기 때문에 기업이 인종차별적인 광고를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아시아인을 이 정도 수위에서 비하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인식이 독일인 사이에서 퍼진다면 추후 더 큰 인종차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차별과 혐오 문제에 민감한 독일 사회에서 이번 논란이 벌어졌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철저한 반성 속에서 반(反)유대주의 등 차별 문제에 대해 대응해왔다.
제도적으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형사범죄화했다.
형법 130조 2항은 인종·민족·종교 등 특정 그룹에 대한 증오심 선동과 악의적 비방, 허위사실 유포 등에 대해 최대 3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로 소수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된 조항이다.
독일은 지난해 10월부터 소셜미디어에서 차별과 혐오, 테러 선동 등의 표현을 삭제하기 위한 '소셜네트워크(SNS) 내 법 집행 개선법'(이하 SNS위법규제법·NetzDG)까지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점증하는 반유대주의에 맞서 정부 차원에서 강력히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지시인 사회 등 주류 사회에서 아시아인 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요 언론인 주간지 차이트는 최근 호른바흐 광고 논란을 다뤘다. 차이트는 광고가 분명한 인종차별주의적 의도로 보기는 힘드나 독일 문화에서 먼 거리에 있는 한국인들의 관점에서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식으로 지적했다.
이원호 베를린자유대 철학 박사는 인터뷰에서 "이런 보도는 독일 내 아시아인들의 인종차별적 경험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광고가 인종차별적 구도에 전혀 기대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데, 설사 의도가 없더라도 광범위한 대중이 인종차별적 이미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의 호른바흐 광고 반대 서명운동과 시위 활동은 아시아인들이 겪는 차별적 경험에 대한 독일 사회의 민감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일에서 차별 문제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경계로 집중화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초기의 방관적 입장을 넘어 나치즘의 범죄가 여전히 자신의 책임이라고 반성하고 있는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그 가운데 반인종주의의 문제가 반유대주의의 문제로 협소하게 인식되는 경향도 굳어졌다"라며 "아시아인 차별 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이 독일 사회에서 고민돼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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