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소 소식 전할 때 울컥"…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승리 이끈 3인
'일본에 기울었던 감정인·1심 패소' 악조건 딛고 승소 이끌어
"방사능 숫자에 집착해서는 안 돼…자국민 보호 노력" 설득 주효
(제네바=연합뉴스) 이광철 특파원 = 세계무역기구(WTO) 건물 중앙에는 유리 지붕으로 덮인 넓은 홀이 있다.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고 여러 개의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이곳 '아트리움'은 평범한 카페처럼 보이지만 실상 각국 대표부 통상 담당 외교관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를 얻는, 총성 없는 무역 전쟁의 치열한 현장이다.
주제네바 대표부 권혁우(47) 참사관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다. 주요국 외교관들과 WTO 현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WTO 사무국 직원들과도 접촉하며 통상 이슈들을 챙긴다.
지난해 3월에는 임기 1년의 WTO 세이프가드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 위원회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 요건과 절차, 피해보상과 보복조치 등의 이행을 감독하는 정례기구다.
산업통상자원부 FTA 협상 총괄과장을 하고 제네바 대표부에서 근무하는 그는 11일(현지시간) WTO 상소기구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를 정당한 조치라며 한국의 손을 들어줬을 때 가장 먼저 한국 정부에 소식을 알린 주인공이다.
권 참사관은 "본부 담당 직원이 밤늦은 시간에 울면서 보도자료를 고친다고 하는데 함께 울컥했다"며 승소 소식을 전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질 거라고 예상했던 분쟁이라 대응 방안 위주로 언론 브리핑 자료를 준비하던 본부 직원들은 이겼다는 소식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울먹였다고 한다.
지난해 2월 1심 분쟁 패널에서 패소한 뒤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위생·식물위생(SPS) 협정과 관련해 피소된 당사국이 패소한 사건이 상소기구에서 뒤집힌 전례가 없었던 것도 부담이었다.
판정이 나오기 전날에는 패소 결정을 받는 '악몽'을 꾸다 새벽에 잠이 깼을 정도였다.
권 참사관은 제네바 대표부에서 정부 각 부처와 협력하며 분쟁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번 분쟁에서도 노유경(43·연수원 32기) 부장판사, 윤영범(37) 서기관과 함께 팀을 꾸려 현장을 지켰다.
사법협력관으로 제네바 대표부에서 근무하는 노 부장판사는 일본과 관련된 분쟁, 한국이 당사국은 아니지만 제삼자로 들어간 분쟁을 담당하며 법률적 논거 마련과 법률 해석에 큰 힘을 보탰다.
노 부장판사는 "1심 패널은 방사능 수치에 집착했다. 우리는 수치만 보고 자국민 보호 수준을 설정한 게 아니었는데 패널은 샘플 수치만 보고 무역 규제라고 봤다"며 "상소기구는 수치뿐 아니라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특수성, 다른 요인도 종합해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SPS 협정 2.3조와 관련해 일본만 부당하게 자의적으로 차별했느냐 하는 게 쟁점이었는데 상소기구가 지리적 특수성과 잠재적 위험성, 자국민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 일본산 수산물이 갖는 특별한 사정 등을 모두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작년 말 상소기구 변론을 앞두고 정하늘(39)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을 단장으로 정부 대표단 20여명이 제네바 호텔에서 3주가까이 전략을 짤 때는 현장을 지켰던 세 사람도 합류했다.
호텔에서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하며 실제 변론을 하듯 심리를 대비했다.
1심 패널은 두 번의 변론 기회가 있지만 상소기구는 단 한 번 변론으로 끝나기 때문에 이 한 번의 변론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1심 때 감정인들이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꾸려져 패널조차 이를 문제 삼은 적도 있어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지는 않았다.
노 부장판사는 "1심 판정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됐다"며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국제사회에서, 특정 기업이 아닌, 모든 국민의 이해가 걸린 사안이라 부담도 컸다"고 말했다.
현지 통상전문가들과 학계의 관심도 집중됐다.
최종판정 전날 제네바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사회를 보던 교수가 "내일 중요한 판정이 나온다"며 참석자들에게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상소 기구가 통상을 통상 자체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환경적 요소를 고려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정은 한국에뿐만 아니라 WTO 역사에도 중요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는 게 현지의 분위기다.
이날 인터뷰 내내 권 참사관의 손에는 낡은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수백번 수천번도 더 뒤져봤을 WTO 규범집이었다.
미국 변호사 자격을 가진 통상전문가인 그였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자는 마음가짐이 규범집에 손때로 묻어났다.
권 참사관은 "상소 때 되겠냐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래 끝까지 가보자고 서로 북돋웠다"며 "본부가 지휘하고 현장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면서 이뤄낸 성과였다"고 말했다.
minor@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