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전 안돼"…교황, 남수단 지도자들 발에 입맞춤 '파격'

입력 2019-04-12 06:10
수정 2019-04-12 08:44
"다시 내전 안돼"…교황, 남수단 지도자들 발에 입맞춤 '파격'

고 이태석 신부가 헌신한 남수단 정치인들, 교황청서 '신뢰구축' 피정

(바티칸시티=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혹한 내전을 겪은 남수단 정부와 반군 지도자들을 교황청으로 초청해 진행한 피정에서 아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들의 발에 입을 맞추는 유례없이 낮은 모습을 보여줬다.

[로이터 제공]

교황은 11일 오후(현지시간) 교황청 내 교황 처소가 위치한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남수단 정부 지도자들에게 "내전으로 돌아가지 말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라"고 호소하면서, 무릎을 꿇고 차례로 이들의 발에 입을 맞췄다.



교황은 오랜 내전으로 대립해온 남수단 정부와 반대파 지도자를 초청해 교황청에서 전날부터 이틀 간 진행한 영적 피정 행사를 마무리짓는 연설에서 "평화를 계속 유지하길, 앞으로 나아가길 형제로서 간청한다"며 "많은 어려움이 있을 터이지만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했다.

교황은 이어 "여러분 사이에서 갈등과 의견 충돌이 있겠지만, 이를 여러분 사이에서만, 즉 사무실 안에만 가둬두고 사람들 앞에서는 손을 잡으라"며 "그러면 여러분들은 남수단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이런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남수단 지도자들의 앞으로 가더니, 수행원의 부축을 받아 무릎을 꿇고 살바 키르 남수단 대통령과 야권 지도자인 리크 마차르 전 부통령, 키르 대통령을 보좌하는 부통령 3명의 발에 차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에 남수단 지도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행사를 생중계한 TV를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교황청 기자실에서는 '아' 하는 장탄식 내지는 탄성이 터졌다.

교황이 무릎 관절에 지병을 앓고 있는데다 정치인들에게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낮은 모습을 보인 것은 거의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부활절을 앞두고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을 기려 재소자나 난민 등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세족식은 해마다 열고 있다.

평소 무릎을 거의 굽히지 않는 교황은 고통을 못 이기듯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피정에 참여한 남수단 지도자 5명 모두의 발에 입을 맞춘 후에야 완전히 일어섰다.

교황의 이런 파격에는 이날 남수단과 국경을 맞댄 수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가뜩이나 불안한 남수단의 평화협정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염려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가 1천200만명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수단은 2011년 이슬람 국가인 수단에서 독립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로, 한국인에게는 고(故) 이태석 신부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곳으로 친숙하다.

이 신부는 2001년 내전과 빈곤에 시달리던 남수단의 오지 톤즈 마을에 정착한 뒤 움막 진료실을 만들어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2008년 대장암 선고를 받고, 2010년 선종했다.

남수단은 이후 2013년 말 키르 대통령 지지자와 마차르 전 부통령의 추종자 사이에 교전이 벌어진 이래 5년 동안 약 40만 명이 숨지고, 수백만 명이 터전을 잃는 참혹한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키르 대통령과 마차르 전 부통령은 작년 9월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내달까지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과거 남수단 정부와 반군이 여러 차례 평화협정을 맺었다가 파기한 전례가 있는 까닭에 국제사회는 이번 평화협정을 계기로 남수단에 평화가 완전히 정착될 수 있을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청은 서로 반목해온 남수단의 지도자들이 기도와 묵상을 함께 하면서 화해와 신뢰구축에 나설 수 있도록 이들을 교황청으로 초청했다.

2017년 남수단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현지 치안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피정에서도 남수단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다시 한번 피력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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