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세 현역 화가 김병기 "난 장거리 선수…예술엔 완성이 없다"
신작 모아 평창동 가나아트 개인전…구상·추상 공존하는 작업
"추상·오브제 넘어 원초적인 그리기에 도달…현대미술 허위성에 반발심"
"이중섭·김환기 등과 친했지만 '들러리' 평가엔 불만…난 나대로 주역"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이게 어떻게 나온 그림이야!" 저렁저렁한 목소리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1층 전시장을 울렸다.
올 초 완성한 대작 '산 동쪽-서사시'를 마주한 화가 김병기(103)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캔버스 속 개나리빛 화면은 굵은 흰 선들로 분할된다. 그 너머에 날카로운 선들이 그어진 모습이 일종의 풍경 같기도 하다.
"캔버스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떼면 이렇게 화면에 여러 개 흰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면 내부적으로는 갈라지고 밖으로는 주변국에 에워싸인 우리나라가 생각납니다. 서정적인 풍경이지만 서사적인 것도 보이지 않습니까."
'최고령 현역 화가' 김병기 삶은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김병기는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고희동, 김관호와 함께 서양미술 선구자로 꼽히는 김찬영이 아버지다. 귀국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 서울대 미대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아 미술계 중심에서 활약했다.
1965년 예술가로서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병기는 점차 잊혔다. 일흔이 넘어서야 미술평론가 윤범모(현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의 도움을 받아 국내 화단에 복귀했다.
이번 전시는 201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백세청풍'을 잇는 행사다.
103세 현역 화가가 신작을 모아 개인전을 여는 일은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개막일인 10일은 마침 작가 생일이기도 했다. 기자들과 만난 김병기는 "이렇게 그림 몇 점 내놓고 생일날 전람회를 열려니 마음이 약해진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한껏 몸을 낮췄다.
출품작 '산 동쪽-서사시'(2019), '은유'(2018), '산 동쪽'(2018) 등은 모두 추상과 구상이 혼재한 그림이다. 작가는 작업을 두고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인 수공업적인 상태의 선에 도달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성품을 갖다 놓고 온갖 해석을 붙인 이른바 '공장 미술' 가격이 폭등하고 추앙받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노인이 돼서 그런지, 현대미술의 허위성에 반발심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야말로 원초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작들은 어두운 갈색조가 강한 예전보다 화사하다. "색채에 대한 욕망이 일기 시작했다. 앞으로 아주 칼라풀한 작품을 선보이겠다"라고 말하던 작가는 "내가 지금 몇살인데 '앞으로'라고 하면 죄송한 말씀이긴 하다"라며 웃기도 했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유영국……. 김병기와 함께 어울렸고 예술적으로도 교감한 이들은 모두 오래전 저세상으로 떠났다.
작가는 "매우 친했던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들러리처럼 이야기되는 데는 불만이 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나는 나대로 주역입니다. 백 살 넘어서도 작업을 하는 장거리 선수인 셈이지요. 인생처럼 작품에는 완성이란 게 없습니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