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등진 한용운 북향집 '심우장' 사적 됐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친필 편지 등도 문화재 등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립운동가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1933년 성북구 성북동에 지어 11년간 거주한 집인 심우장(尋牛莊)이 사적이 됐다.
문화재청은 서울시 기념물 제7호인 '만해 한용운 심우장'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지정했다고 8일 밝혔다.
조선시대에 메주를 쑤던 한양도성 인근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소는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빗댄 말이다.
심우장은 전형적인 근대기 도시 한옥으로, 남향이 아닌 동북향으로 지은 점이 특징이다. 만해가 국권을 빼앗은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방향을 택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54세이던 1933년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 벽산 스님이 사둔 성북구 땅을 받아 손수 목공 일을 해 집을 세웠다.
이후 심우장은 민족지사와 문인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37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일송 김동삼이 순국하자 유해를 모셔와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정면 4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기와집 한 채가 남아 있다. 하지만 1952년 매각 당시 기록에 따르면 16㎡ 면적의 또 다른 건물이 있었다.
또 1962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오늘날 존재하는 사랑채 앞쪽과 옆쪽 툇마루는 과거에 없었다. 기단부 아래에 설치한 석재도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우장은 한용운의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1900∼1932)이 의거를 감행하기 전에 남긴 선서문, 백범 김구와 주고받은 친필 편지·의거자금 송금증서는 문화재로 등록됐다.
등록문화재 제745-1호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이봉창이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난 뒤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 동생인 안공근 집에서 선서식을 하고 서명했다는 문서다.
선서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했으며, 가로 20.1㎝·세로 32.3㎝다. 본문과 인명·날짜는 먹색이 달라 시차를 두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문장이 윤봉길 선서문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등록문화재 제745-2호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봉투 및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이봉창이 김구에게 의거자금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와 이를 받은 김구가 돈을 송금한 증서 일체다.
이봉창은 의거를 위해 일본에 도착한 뒤인 1931년 12월 24일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부쳤다. 그는 수신인 '백정선(白貞善) 선생'에게 의거를 '물품'에 비유하면서 "물품은 확실히 다음 달 중에 팔리니까 아무쪼록 안심하십시오"라고 반흘림체 일본어로 적었다.
이에 김구는 1931년 12월 28일 요코하마 쇼킨(正金) 은행 상하이 지점을 통해 100엔을 보냈다.
문화재청은 이봉창 관련 유물이 거의 남지 않은 데다 의거 전개 과정과 항일독립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박물관이 지난 2월 26일 개막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수립 기획전에 공개됐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