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도, 손녀도 울었다…눈물의 제주4·3추념식(종합)

입력 2019-04-03 13:37
수정 2019-04-03 16:21
할머니도, 손녀도 울었다…눈물의 제주4·3추념식(종합)

이낙연 총리, 도올, 유아인 등 출연진도 제주의 아픈 역사에 울음 삼켜

유족들, 희생자 각명비·행방불명인 표석 앞에서 제사 지내며 오열

(제주=연합뉴스) 전지혜 백나용 기자 = 3일 열린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은 제주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눈물 흘렸다.

유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추념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위패와 표석을 깨끗이 닦으며 그리운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 할머니도 손녀도, 국무총리도 출연진도 모두 울었다

국무총리, 유력 정치인, 도민, 출연진들까지….

이날 추념식 참석자들은 4·3의 아픔 앞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올해 추념식은 4·3 희생자들이 겪은 억압과 4·3 생존 수형인 18인이 사실상 무죄라는 의미의 '공소기각' 판결을 형상화한 퍼포먼스 '벽을 넘어서'로 시작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회색빛으로 분장한 무용수들은 좌절과 억압을 몸짓으로 표현했고, 퍼포먼스가 절정에 달하고 벽이 허물어졌다.

벽 뒤에는 생존 수형인들이 서 있었다.

수형인들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벽을 넘어 자신들을 찾아온 이들의 회색 얼굴을 어루만지며 죄를 씻어내듯 한명, 한명 깨끗이 얼굴을 닦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70년 만에 무죄 인정을 받은 수형인들의 결백함을 표현하는 퍼포먼스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훔쳤다.



8살 어린 나이에 4·3을 경험한 김연옥 할머니의 손녀 정향신(23)씨가 낭독한 할머니의 사연 역시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4·3 유족이자 후유장애인인 김 할머니는 4·3 당시 조부모, 부모, 형제를 모두 잃어 홀로 살아남았고 그 후로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정씨는 "할머니는 가족이 땅도 아니고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에 물고기는 멸치 하나조차 드시지 않았다고 한다"며 "멋쟁이인 우리 할머니가 그런 아픔 속에서 사셨는지 몰랐다"고 울먹였다.

정씨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쁘다. 힘든 길을 묵묵히 견뎌온 멋진 사람이다. 오늘 약속 하나만 해요. 앞으로는 울지 않고 매일매일 웃겠다고"라며 할머니를 위로했다.

김 할머니는 손녀의 말을 듣는 내내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였던 때로 돌아간 듯 엉엉 울었고,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들도 눈물을 훔치며 위로와 격려를 담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낙연 국무총리 역시 추념사에서 젖먹이, 임신부, 팔순 노인까지 무차별하게 살해당한 참상을 설명하던 도중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총리는 "도민 여러분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4·3의 진실을 채우고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다"며 희생자 유해 발굴과 실종자 확인, 생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지원 확대 등을 약속했다.

'제주평화선언'을 낭독한 도올 김용옥도 말미에 "나는 제주도를 사랑합니다. 그냥 사랑합니다. 해녀들이 부르는 평화의 노래가 하도 해변을 걷는 나의 뺨을 여전히 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외치며 '이여도사나' 가사를 읊다가 목이 멨다.

배우 유아인도 전국 대표 6인에 이어 '71년의 다짐'을 발표하던 도중 4·3 당시 제주도민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되새기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4·3 3세대인 유족이 1세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4·3정신을 기억하는 내일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아직도 오지 않은 제주의 봄…"나가 죽을걸, 나가 죽을걸…."

"어디 강 좋은 목숨 바쳐 죽어 신지. 나가 대신 죽을 걸, 나가 대신 죽을걸…."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인 이날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 추념식장. 까마귀들이 유족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구슬프게 울어댔다.

북받치는 슬픔을 참으며 입술을 굳게 다문 유족들이 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았다.

4·3 당시 행방불명 돼 시신조차 찾지 못한 희생자의 이름만 새겨진 3천8천여 기의 표석이 70여 년 세월의 그리움만큼이나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족들은 그리운 이의 얼굴을 쓰다듬듯 표석을 닦고 또 닦으며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4·3 당시 형제 두 명을 잃은 양경숙(96·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양경주(80·〃) 할머니는 절을 올리다 그날의 한(恨)을 토해냈다.

양경주 할머니는 "1948년 9월 작은아버지 제삿날, 경찰이 당시 20살이었던 작은 오빠를 끌고 간 이후 여태껏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며 "작은 오빠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큰오빠가 제주로 내려와 작은 오빠를 수소문하던 중 큰오빠마저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양경숙 할머니는 산으로 피신한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지서에 끌려가 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해 눈이 멀고, 한쪽 어깨가 꺾이고 팔목 뼈가 튀어나오는 후유장애를 앓고 있다.



4·3 당시 제주가 아닌 전국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영령도 있다.

오문순(85) 할아버지는 가족 함께 4·3 당시 행방불명된 큰형(오문정·1925년생)의 표석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당시 제주도를 떠나 살고 있던 오 할아버지의 큰형은 제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이 걱정돼 중산간에 있는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고향 집을 찾았다가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큰형은 한동안 가족과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울의 형무소에 있다고 해서 추울까 봐 솜을 넣은 누빔 옷을 보냈더니 '잘 받았다'는 답신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닷새 전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겨 그즈음 돌아가신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생일을 기일로 제사를 지내고 있고, 4·3 때마다 이곳을 찾아 술과 음식을 올리고 있다며 슬픔을 삼켰다.



1만4천여 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봉안실에도 어두운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족들은 국화를 올리고, 손수건으로 위패 한번, 눈물 한 번 닦으며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큰아버지와 고모의 위패를 찾아온 고경철(55·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씨는 그날을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인 정경자(53) 씨와 매년 추념일마다 위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고씨는 "큰아버지는 4·3 때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했고, 고모는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 행방불명됐다고 전해 들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큰아버지와 고모의 위패를 잊지 말고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4·3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며 "비록 아버지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앞으로 4·3 문제가 명확히 밝혀져 살아가신 분들이라도 억울함을 풀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atoz@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