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오지 않은 제주의 봄…"나가 죽을걸, 나가 죽을걸…."

입력 2019-04-03 09:58
수정 2019-04-03 14:55
아직도 오지 않은 제주의 봄…"나가 죽을걸, 나가 죽을걸…."

눈물의 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제주=연합뉴스) 전지혜 백나용 기자 = "어디 강 좋은 목숨 바쳐 죽어 신지. 나가 죽을 걸, 나가 죽을걸…."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 추념식장. 까마귀들이 유족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구슬프게 울어댔다.

북받치는 슬픔을 참으며 입술을 굳게 다문 유족들이 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았다.

4·3 당시 행방불명 돼 시신조차 찾지 못한 희생자의 이름만 새겨진 3천8천여 기의 표석이 70여 년 세월의 그리움만큼이나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족들은 그리운 이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표석을 닦고 또 닦으며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4·3 당시 오빠 두 명을 잃은 양경숙(96·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양경주(80·〃) 할머니는 절을 올리다 그날의 한(恨)을 토해냈다.

양경주 할머니는 "1948년 9월 작은아버지 제삿날, 경찰이 당시 20살이었던 작은 오빠를 끌고 간 이후 여태껏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며 "작은 오빠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큰오빠가 제주로 내려와 작은 오빠를 수소문하던 중 큰오빠마저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양경숙 할머니는 산으로 피신한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지서에 끌려가 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해 후유장애를 앓고 있다.

양경숙 할머니는 "지서에 있던 나무에 손을 뒤로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해 어깨가 꺾이고 팔목 뼈도 튀어나왔다"며 "더러운 물통에 처박히는 고문으로 눈까지 멀었다. 죽을만하면 살리고, 죽을만하면 살렸다"고 울분을 토했다.

당시 4살이었던 딸 강맹수(75)씨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4·3은 떠나는 순간 정든 고향 땅조차 밟을 수 없게 했다.





오문순(85) 할아버지는 아내, 아들과 함께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아 4·3 당시 행방불명된 큰형(오문정·1925년생)의 표석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오 할아버지의 큰형은 당시 일자리를 찾아 제주도 외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제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걱정돼 중산간에 있는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고향 집을 찾았다가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한동안 가족과 서신으로 연락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서울의 형무소에 있다고 해서 추울까 봐 솜을 넣은 누빔 옷을 보냈더니 잘 받았다는 답신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닷새 전인 6월 20일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뒤로 연락이 끊겨 그즈음 돌아가신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서 생일을 기일로 제사를 지내고 있고, 4·3 때마다 이곳을 찾아 술과 음식을 올리고 있다며 눈물을 훔쳤다.

1만4천여 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봉안실에는 헌화와 추념의 발길이 이어졌다.



큰아버지와 고모의 위패를 찾아온 고경철(55·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씨는 그날을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인 정경자(53) 씨와 매년 추념일마다 위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고씨는 "큰아버지는 4·3 때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했고, 고모는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 행방불명됐다고 전해 들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큰아버지와 고모의 위패를 잊지 말고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4·3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며 "비록 아버지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앞으로 4·3 문제가 명확히 밝혀져 살아가신 분들이라도 억울함을 풀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dragon.m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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