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트 만들기 45년 외길 일본기업 '괴짜' 사장
"보는 것, 만지는 것 모두가 스승"…한국인 기술자 2명도 근무
(오사카=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작지만 경쟁력이 뛰어난 강소(强小)기업이 산업기반을 떠받치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 바탕에는 '모노즈쿠리'(物作り)로 불리는 독특한 기업 문화가 깔려 있다.
모노즈쿠리는 오랜 기간 한 분야에 천착하며 기술을 쌓아 정교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정신을 말한다.
오사카(大阪) 동부의 인구 50만 명 도시인 히가시오사카(東大阪).
이곳은 약 6천개 공장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모노즈쿠리의 도시다.
일본에서 도시별 공장 수로 따지면 요코하마(橫浜)에 이어 5번째고, 주거 가능 면적으론 ㎢당 공장 수가 115개로 기업 밀집도가 가장 높다.
이들 기업의 특징은 대부분이 대기업 계열이 아니라는 점이다. 90% 이상은 오너형 독립기업으로 개성이 강한 제품을 만든다.
그중 한 사례가 1974년 설립된 하드록(HARDLOCK)이다.
영어로 된 회사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하드록은 조임 효과가 뛰어난 다양한 너트 제품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현재 전체 직원 106명에 연 매출 21억엔(약 210억원)을 올리는 이 회사를 키워온 것은 현 사장인 와카바야시 가쓰히코(若林克彦) 씨다.
올해 85세인 와카바야시 사장은 밸브 설계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 생활 6년째이던 1960년 오사카의 한 밸브 가게에 들른 것이 '너트 인생'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그곳에서 잘 안 풀린다는 너트를 봤는데 그것보다 더 완벽한 제품을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을 품게 된 것이다.
가게 직원에게 사정해서 샘플을 받아 집으로 가져와 너트 구조를 연구했다.
나선형으로 돼 있는 너트는 단순한 듯 보였지만 구조가 복잡했다.
와카바야시 사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자전거 설계를 하던 동생과 다른 친구 한 명을 끌어들여 너트를 전문으로 하는 구멍가게같은 회사를 차렸다.
오로지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샘플 제품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오사카에 있는 너트 도매상으로 샘플을 가져가 사달라고 간청했으나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와카바야시 사장은 거듭 퇴짜를 맞자 너트를 실제로 사용하는 현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또 퇴짜 맞을까 봐 무서워 우리가 만든 너트 몇 개를 상자에 넣어서 공사 현장에 두고 도망쳤어요."
물론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1년이 지났지만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동생과 친구는 "돈 낭비일 뿐"이라며 "그만두자"고 했다.
절망의 기나긴 터널 속으로 마침내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한 상자만 만들어 달라"는 고객이 나타났다. 이전에 샘플로 받았던 고객이 처음으로 주문해 온 것이었다.
와카바야시 사장이 만든 너트 품질이 좋다는 얘기가 입소문을 타고 번지면서 이곳저곳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창업 3년 만에 적은 월급이나마 직원들에게 줄 수 있었고 15년째는 매출이 1억2천만엔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곳저곳에 판매한 너트 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진다는 클레임을 받게 됐다.
그것을 계기로 외부 진동으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너트를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때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고 한다.
신사(神社) 건물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인 도리이(鳥居)에 들어가는 쐐기였다.
도리이를 세울 때 가로대와 세로대가 서로 흔들리지 않도록 쐐기를 쓰는데, 이를 너트 제작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개발해 수많은 특허를 낸 것이 지금 전 세계로 팔려나가는 하드록 너트의 모태다.
하드록 너트는 모양이 다른 요철(凹凸) 너트가 한 세트다.
쐐기 역할을 하는 볼록 너트를 오목 너트로 조여주는 구조여서 강력한 조임 효과가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하드록은 현재 풀림 방지 관련 너트 기술에서 약 20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특허 기술로 제작한 제품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하드록 너트가 가장 많이 들어간 데는 일본 신칸센 철도다.
원래는 U자 모형의 너트가 선로 등을 묶는 데 사용됐지만 지금은 풀림 방지 효과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입증된 하드록 너트가 100%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드록 너트는 미국, 영국, 호주, 중국 등에도 수출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는 기술제휴를 한 한국하드록이 다양한 너트 제품을 생산해 공급하고 있다.
현재 전체 매출의 20% 정도가 해외시장에서 발생하고, 그중에서 중국이 가장 크다.
도쿄의 랜드마크 타워인 스카이 트리에는 크고 작은 하드록 너트 40만 세트가 들어갔다. 미국 우주왕복선 발사대를 세우는 데도 쓰였다.
와카바야시 사장은 "우리 제품은 100년 품질을 보증한다"고 자신했다.
이 회사에는 한국인 기술자도 2명 일하고 있다.
9년째 일하며 너트 제작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김병국 씨(36)는 지난 20일 이 회사 오사카 공장을 방문한 도쿄 주재 특파원들을 상대로 하드록 너트와 타사 제품을 비교하는 실험을 보여줬다.
그는 "너트 제작이 단순해 보이지만 풀림 방지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간 약 2천500만 세트의 너트를 팔아 21억엔의 매출을 올리는 하드록은 현재 치과용 임플란트와 인공위성용 나사를 개발 중이다.
이 회사 공장 건물 2층에는 철도역을 정교하게 재현한 미니 철도박물관이 있다.
실물 기관차처럼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면서 달리는 모형 기관차까지 갖추고 있다.
너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철도와 기관차(열차) 연구에 취미를 가진 와카바야시 사장의 놀이터이자 연구개발실이라고 했다.
한 직원은 "10년에 걸쳐 2천만엔(약 2억원) 정도를 들여 만들었다"며 "철도를 좋아하는 사장님의 광적인 취미가 하드록의 기술 축적에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독일인 기자는 '마니아'라는 단어로 와카바야시 사장을 표현했다.
올해 85세라는 고령 때문에 와카바야시 사장이 매일 출근해 일을 하는지도 취재진의 관심사였다.
"당연하죠. 매일 출근해 조회도 합니다. 전 직원이 사훈을 함께 외친 뒤 일을 시작하죠."
하드록 임직원들이 큰소리로 읽는다는 사훈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우리가 보는 것, 만지는 것 모두가 우리의 스승이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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