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겉모양 같아도 상황특수성·동기 따라 판단 갈려

입력 2019-03-26 15:54
'블랙리스트' 겉모양 같아도 상황특수성·동기 따라 판단 갈려

김은경 전 장관 영장 기각…"탄핵정국으로 기강 해이 문제"

朴정부 블랙리스트는 유죄 판결…"사직 강요, 합리적 이유 없었다"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과거 법원의 판단과 차별되는 지점에 눈길이 쏠린다.

김 전 장관의 영장청구 사유였던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비슷한 외관을 띤다. 공공기관 소속 인사 몇몇을 퇴출 명단에 올려놓고 사실상 이들의 사직을 종용했다는 의혹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객관적 사실관계를 놓고 볼 땐 항소심까지 유죄 판단이 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달리 김 전 장관의 영장이 기각된 것은 그의 행위가 사실상 '적정한 인사권'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판단을 영장 재판부가 내놨기 때문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박정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영장을 기각하며 그가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표를 제출하게 하고 표적 감사를 한 혐의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공공기관 인사나 감찰권이 적절히 행사되지 못했고, 이 때문에 공공기관의 방만한 운영과 기강 해이가 문제 된 만큼 그 '동기'에 참작할 사정이 있다고 본 것이다.

박 부장판사는 새 정부가 해당 기관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수요 파악' 차원에서 사직 의사를 확인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전 장관의 혐의사실 중 환경공단 상임감사 선발 과정에 특정 인사를 '밀어주기'했다는 부분은 "임원추천위원회 단계에서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고의나 위법성 인식이 희박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실관계는 대체로 인정되지만 인사 시기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범행의 동기나 고의성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반면 이와 사실관계가 유사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직권남용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은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들의 사직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유죄 판단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사직서 제출 요구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게 근거였다. 당시 재판부는 "그들이 위법한 지원배제 명단 실행에 소극적인 유진룡 문체부 장관의 측근이었다는 사정만으로 자의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게 한 것"이라며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서 '나쁜 사람'으로 찍힌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장의 사직을 강요한 것도 역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으로 하여금 그 의사에 반해 사직서를 내게 요구해 면직한 것은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직업 공무원 제도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공무원들에 대한 사퇴 강요 행위를 놓고 '범행 동기'와 '고의성' 인정돼 '적정한 인사권'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공무원들이 사퇴를 강요당한 시점이 김 전 장관의 사건에서처럼 정부가 인사 운영을 새로 정비하던 때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집권 초반의 이른바 공공기관 '물갈이 인사'라면 어느 정도는 관행으로 볼 수 있지만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런 시기에 발생한 일이 아닌 점도 두 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달라진 배경으로 꼽힌다.

다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김 전 장관의 영장을 기각한 재판부가 '관행'이라는 이유로 법령에 저촉될 우려가 있는 '물갈이 인사'를 단행한 행위에 면죄부를 준 모양새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김 전 장관의 영장 재판부가 기소되기도 전에 사실상 '본안 판단'에 가까운 기각 사유를 밝힌 건 부적절하게 비칠 수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영장심사는 재판 이전 단계이고 구속 사유를 판단하는 것"이라며 "영장 단계에서 '탄핵 정국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고의적이지 않다'고 얘기하는 건 과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s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