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결핵 후진국'의 불명예를 언제 벗을 것인가
(서울=연합뉴스) 결핵은 가장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왔고,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이다. 기원전 5000년경 선사시대 유골에도 결핵균에 감염된 흔적이 남아 있고 고대 이집트와 인도에서도 발병 증거와 기록이 발견된다.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특성상 18∼19세기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전 세계로 번져 나갔다. 온몸을 검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페스트가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라고 불린 것에 빗대어 환자의 낯빛을 창백하게 만드는 결핵에는 백사병(白死病·White Death) 혹은 백색 페스트(White Plague)라는 별칭이 붙었다.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는 병원균의 분리 배양 등에 관한 이른바 '코흐의 4원칙'을 정립해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881년 세균의 표본 고정법, 염색법, 현미경 사진 촬영법을 창시한 뒤 이듬해 결핵균을 발견해 3월 24일 베를린 생리학회에 발표했다. 국제항결핵 및 폐질환연맹(IUATLD)과 세계보건기구(WHO)는 1982년 결핵균 발견 100주년을 기념해 이날을 '세계 결핵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도 1989년부터 '세계 결핵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해오다가 2011년 이날을 법정기념일인 '결핵 예방의 날'로 명명했다. 오는 24일은 제38회 세계 결핵의 날이자 제9회 결핵 예방의 날이다.
코흐가 1890년 투베르쿨린 반응 검사법을 창안한 데 이어 1906년 BCG 예방접종이 개발되긴 했지만 20세기 들어서도 결핵의 위세는 꺾이지 않았다. 자각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격리나 치료에 어려움이 따르고, X선 검사도 20세기 전반까지는 비용이 많이 들어 일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3년 스트렙토마이신을 시작으로 항결핵제가 잇따라 등장해 결핵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초기 증상이 감기와 비슷해 치료 시기를 놓치기 일쑤여서 지금도 1분에 3명꼴로 매일 4천500명, 1년에 160만 명씩 결핵 환자가 숨지고 있다(2017년 기준).
결핵 예방에는 충분한 영양 공급과 깨끗한 환경이 필수적이다. 결핵이 후진국병으로 불리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는 세계 최다 발병국가로 꼽혔고, 6·25 전쟁 후에도 해마다 수백만 명의 결핵 환자가 발생했다. 이광수·김유정·이상·현진건 등 유명 문학가들도 결핵으로 고통받다가 짧은 생을 마쳤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기침하다가 피를 토하는 '폐병쟁이'가 단골로 등장했다. 크리스마스 카드 봉투에 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한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을 붙여 우송하는 풍토도 한동안 널리 유행했다. 크리스마스실은 덴마크의 우체국 직원 아이날 홀벨에 의해 1904년 탄생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캐나다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가 1932년 처음 발행했다.
생활 수준의 향상 등으로 이제 주변에서 결핵 환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 습관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쩌다 받는다 해도 크리스마스실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 1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1996년 OECD 가입 이래 한 번도 놓치지 않은 불명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결핵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70.0명으로 216개국 가운데 84위에 랭크돼 있다. 최고를 기록한 레소토(665명)나 6위인 북한(513명)보다는 훨씬 낮지만 OECD 회원국만 따지면 2위인 라트비아(32.0명)보다 갑절 이상 높고 가장 낮은 미국(3.1명)의 20배가 넘는다. 9위인 일본도 15.0명으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결핵 사망률은 10만 명당 5.0명으로 216개국 중 99위다. 발생률보다는 다소 나은 성적이지만 경제 규모나 1인당 국민소득에 비춰보면 매우 낙후한 수준이다. 사망률 세계 1위 역시 레소토(252명)가 차지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서는 한국에 이어 라트비아(3.7명), 칠레(2.8명), 포르투갈(2.4명), 멕시코·일본(각 2.2명) 순으로 높았다.
질병관리본부가 최근 발표한 '집단시설 내 검진 결과'도 충격적이다. 지난해 3월부터 연말까지 병원·학교·어린이집·사회복지시설 등 집단시설 종사자와 교정시설 재소자 등 85만7천765명을 검진한 결과 14.8%가 잠복결핵 감염자로 나타났는데, 치료에 들어간 사람은 31.7%에 지나지 않았다. 잠복결핵 감염은 몸 안에 결핵균이 존재하지만 활동하거나 증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결핵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시키지 않으나 이 가운데 10%가량은 면역력이 떨어져 나중에 결핵 환자가 된다고 한다.
질병관리본부는 제1기 결핵관리 종합계획(2013∼2017년)을 시행해 신환자 발생률을 2011년 이후 연평균 5.8% 감소시키고 3만 명대 수준이던 신환자 수를 2017년 처음으로 2만 명대로 끌어내렸다. 이어 지난해 8월 제2기 종합계획(2018∼2022년)을 세워 2022년까지 결핵 발생률을 10만 명당 40명으로 줄이고 2035년에는 퇴치 수준(10명 이하)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각종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화 추세에 따라 노인 결핵 환자가 갈수록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 장애물이다. 외국인 결핵 환자의 유입 가능성도 우려되고, 남북 교류 확대에 따른 감염 위험성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여러 약제에 내성(耐性)을 지녀 치료 기간이 길고 치사율이 높은 이른바 슈퍼 결핵의 출현도 인류의 숙원인 결핵 극복의 꿈을 위협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의 질병 퇴치를 돕는 공적개발원조(ODA)의 모범 국가가 스스로 후진국형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보건 당국의 책임이 적지 않지만 국민의 경각심이 떨어진 탓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제 소중한 사람에게 크리스마스실을 연하장에 붙여 보내는 대신 결핵 예방 수칙이나 검진 캠페인 등을 담은 모바일 메시지를 SNS로 주고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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