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⑧'성과없어도 정상회담 좋다' 분단 벽앞 총리도 시민도 냉철
주간 차이트 "브란트 총리, 마스크 쓰고 있는 듯한 인상"
동서독 정상회담 합의문 없어도 '실망이다'는 반응은 12%
브란트, 야당과 소통 중시…정상회담 직전·직후 야당 인사와 만나
야당, 의회서 브란트에 박수 속 냉철한 비판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에 이어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을 주제로 한 두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⑦ 정상회담장앞 좌우충돌로 아수라장…"극단주의 저급성"
⑧ '성과없어도 정상회담 좋다' 분단 벽앞 총리도 시민도 냉철 ←←
⑨ 동독 마지막 외무 "남북정상, 한국전쟁 전몰자 함께 추모해야"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분단 이후 동서독 정상이 오가며 회담을 벌인 1970년 3월과 5월, 많은 서독 시민들은 들떠있었다.
1차 정상회담장인 동독의 에어푸르트행 특별기차에 올라탄 빌리 브란트 총리는 많은 시민의 환송을 받았다.
브란트 서독 총리의 신동방정책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분단 후 처음으로 양측 정상이 머리를 맞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초 결과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당국자, 야당, 국민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런 탓에 정상회담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어도 여론은 질책보다 차분히 박수를 보냈다.
야당도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야당의 대(對)동독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20여년 간 쌓아 올린 현실의 벽을 묵묵히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신뢰의 고리를 만드는 것 자체로 만족해하며 함께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특히 취임 후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며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을 마련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시종일관 냉철했다.
서독 카셀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에선 좌우 시위대 간에 물리적 충돌도 있었지만, 서독인들은 대체로 차분했다.
◇ 정상회담에 들뜬 동서독 시민, 브란트는 무표정·자제 요청
브란트 총리는 1970년 3월 동독 에어푸르트에서의 1차 정상회담장에 가는 길부터 표정 관리를 했다.
브란트 총리는 에어푸르트로 가는 특별열차에서 취재진에게 "국민은 수상이 인간적 감정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들에게도 현실적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분위기를 전달해 너무 들뜨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간지 차이트는 같은 달 27일 자 기사에서 "브란트 총리는 에어푸르트에서 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듯한 인상을 보여줬다"면서 "이는 브란트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열의와 인간적으로 받은 감동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했다.
브란트 총리는 동독에서 예상치 못한 환영을 받았다.
동독의 에어푸르트행 특별기차에 올라탄 브란트 총리는 철조망과 지뢰밭을 넘어 동독의 경계로 들어선 뒤 들판, 집 창문에서 손을 흔드는 동독인들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브란트 총리가 회담 장소로 들어설 때는 동독 시민들이 '빌리(Willy)'를 연호했다.
그러나 환호가 멈추지 않자 브란트 총리는 발코니로 나가 손짓으로 자제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빌리 슈토프 총리 측이 자극을 받아 회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더구나 브란트 총리는 슈토프 총리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동독 시민이 외친 '빌리'가 자신의 이름(Willy)이 아닌 슈토프 총리의 이름(Willi)이었다며 외교적인 수사를 구사했다.
정상회담 도중 이번에는 동독의 지배정당인 사회주의통일당원들이 모여 '동독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서독 측을 압박했다.
차이트는 "브란트 총리는 에어푸르트에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어딘가 먼 곳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줬다"고 기록했다.
브란트 총리는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취재진에게 "카셀 회담만 별도로 보지 말고 현재 이뤄지는 모스크바와 바르샤바와의 협상의 틀을 함께 봐 달라"고 주문했다.
1차 정상회담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브란트 총리가 다음날 의회에 보고차 들어섰을 때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브란트 총리가 그때까지 의회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박수였다.
브란트 총리는 의회 보고 과정에서도 전반적으로 냉정함을 유지했다.
야당도 정상회담에서 브란트 총리의 입장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지만 차분함을 유지했다.
기독민주당의 라이너 바르첼 대표는 의회에서 브란트 총리의 보고가 끝난 직후 연단에서 "통일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자기 결정권을 협상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해온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동독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면서 통일에 이르는 길로 평화공존을 내세운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을 비판해왔다.
그러면서도 바르첼 대표는 연설에서 기민·기사당 연합은 정상회담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정상회담 진행에 해가 될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
이후 바르첼 대표는 '철사줄 위에서'라는 회고록에서 당시 연설에 대해 "가장 힘든 의회 연설"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회고록에서 "에어푸르트 정상회담 전날 저녁 브란트 총리에게 '야권은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가져와야 한다거나, 이를 위해 시간적으로 압박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동독의 요구가 커서 회담이 전혀 성과를 못 내더라도 야권이 기뻐해 이용할 일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브란트 총리는 시민들의 기대감을 활용한 정치적 이벤트를 자제한 채 차분함을 유지했고, 야당은 대(對)동독정책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되 격을 지킨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1·2차 동서독 정상회담 모두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여야의 명확한 현실 인식이 뒷받침돼 있었다.
당시 서독은 동서독 정상회담에 앞서 소련, 폴란드와 각각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진전을 이뤘다.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인 동독이 울며 겨자먹기로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서독 간에는 입장차가 컸다.
동독은 우선으로 서독이 동독을 국내외적으로 개별 국가로 인정해야 하는 데다 경제적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서독 정부 측에선 국내정치 여건 등을 고려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기 때문에 회담은 평행선을 달렸다.
브란트 총리는 이미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왔지만, 동독과의 관계는 다른 외국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내국적 특수관계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브란트 총리는 정상회담을 앞뒤로 야당과의 소통도 중시했다.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의 3월 17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사회민주당의 브란트 총리는 1차 정상회담 직전인 3월 16일 바르첼 대표를 초대해 회담을 가졌다.
2차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5월 25일 원내교섭단체회의 보고록 기록에 따르면, 브란트 총리는 당일 야당인 기민·기사당 의원 몇 명을 초대해 정상회담 경과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 성과없는 회담 결과에도 시민들은 '만족' 반응
성과를 내지 못한 정상회담에 대해 서독 시민들은 의외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기획과정에서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의 동서 정상회담에 대한 당시 설문조사를 찾아봤다.
1970년 3월 1차 정상회담 직후 '브란트와 슈토프의 대화 결과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만족한다'는 의견이 41%에 달했다.
'만족도 실망도 안 한다'는 응답이 28%였다. '실망이다'는 반응은 12%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근 동서독이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인가'라는 질문에 '변화 없다'는 답변이 45%에 달했다.
'가까워졌다'는 34%, '멀어졌다'는 11%였다.
통일을 염원하는 여론이 다수였지만, 현실적으로 분단이 고착화할 것이라는 냉철한 인식을 보인 셈이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다.
1971년 8∼9월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처럼 독일이 한 국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한 국가가 최선'이라는 응답이 60%에 달했다.
'한 국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30%였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65%는 '동서독이 분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일이 될 것'이라는 답변은 21%에 불과했다.
언론도 대체로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
슈피겔은 1차 정상회담이 끝난 뒤 "동서독 관계가 나아질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브란트 총리의 말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감정이 이렇게 강해지고 희망이 커지는 시기에 이런 경고는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도 1차 정상회담 다음 날 기사에 "브란트 총리가 의회에서 동서독 관계의 목표가 '규칙에 입각한 이웃관계'에서 '평화로운 공존관계'로 변해간다고 이야기한 것은 현재로서는 장기적인 목표로 봐야 한다"라며 "브란트 총리도 내각 인사들에게 '아주 멀고도 먼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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