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쟁이 80대 폐인"…50세 순종 인터뷰한 獨기자의 시선

입력 2019-03-14 06:05
"아편쟁이 80대 폐인"…50세 순종 인터뷰한 獨기자의 시선

1924년 獨신문의 순종 보도…"일본, 명성황후 때린 뒤 산채로 불에 태워"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황제는 갑자기 온몸으로 기침을 했다. 그는 곧 죽을 것 같았다. 한 폐인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아무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에 독일 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 기자가 순종을 인터뷰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1924년 5월 3일자 '오늘의 서울, 황제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연합뉴스가 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 Heyryun KOH)를 통해 입수한 내용이다.

독일 기자는 아르날도 치폴라라는 이탈리아 기자와 함께 순종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독일 기자의 이름은 신문에 나오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철도청 소속 호텔에서 한국 측 안내인을 만났다.

안내인은 프랑스 선교사 주교를 만나보라고 제안했지만, 독일 기자는 순종을 만나러 왔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 기자는 "안내인들은 모두 놀랐고, 아직 어떤 여행자도 거의 잊혀 가는 황제를 만나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고 적었다.

순종을 만나는 비용은 50엔이었단다. 20엔은 안내자와 통역자를 위한 것이고, 30엔은 순종의 주변 근무자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는 당일 얼마 지나지 않아 순종이 거처하던 궁에서 이뤄졌다. 명시는 안됐지만 창덕궁으로 보인다.

순종은 즉위한 뒤 일제의 압력에 의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독일 기자는 순종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80세 정도의 깡마르고 햇빛을 보지 않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황제는 그저 아편을 피우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그는 가족만 남았고, 한국 정치의 비극적 인물이다"

기자의 추측과 달리 당시 순종은 50세에 불과했다.

기사에서는 계속 순종이 무기력한 인물로 표현됐다.

"어리석은 노인은 궁전 안의 딱딱하고 불편한 권좌에 앉아있고, 그 방은 양탄자가 있고 중국 도자기로 장식돼 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만지면서 그의 힘없는 눈이 나를 주시했다. 통역자가 나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그는 듣는 것 같지 않았다…(중략) 황제는 너무 말랐는데, 마치 해골을 보는 것처럼 혹은 아편을 피우는 사람한테서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는 검은색 겉옷을 입었다. 그의 자줏빛 회색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독일 기자가 순종을 인터뷰하는 과정과 인터뷰 내용을 기사화한 것이었지만, 순종의 답변은 없었다.

"나는 순종이 황제 시절 이탈리아 대표사절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답 대신에 황제는 입가에 이해하지 못할 미소를 띠었다"

독일 기자는 일본의 관동대지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으나, 역시 순종의 답변은 없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지진재난이 '교토의 미미츠카(귀무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와 묻은 곳)에 대한 복수였을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기자는 일제 만행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기사의 맥락에서는 한국에 대한 동정심도 읽혔다.

"그(순종)를 보니 1898년 10월 밤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친다. 서울의 민중봉기 때문에 일본은 끔찍하게 그들을 탄압했다. 미친 군대들은 고종 황제의 궁을 침입해 명성황후가 자고 있는 방까지 와서 궁녀들을 죽이고, 황후를 처참하게 때린 후 석유를 붓고 살아있는 채 불에 태워 죽였다. 같은 운명에 놓일 뻔한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그 후에 불행한 왕조는 고난의 길뿐이었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된 뒤 불에 태워졌다는 기록들은 있었으나, 독일 기자는 명성황후가 산 채로 불에 탔다고 적은 점은 특이한 점이다.

독일 기자는 인터뷰 제안을 한 뒤 순종을 만나기 전까지 잠시 대기하던 궁의 모습을 묘사했다. 일제에 의해 개방돼 전시회가 열리던 궁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공원을 지나 이전 황제의 궁이었던 곳으로 갔다. 수많은 사람이 잣나무 그늘 아래 있었고,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했다…(중략) 정원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들리는 데 독일의 목동 노래다"

화사한 봄날, 이곳 바로 옆에 국권을 빼앗긴 채 독일 기자의 눈에 '폐인'으로 비친 순종이 살아가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은 고 교수에게 이번 연구를 진행했고, 지난해 12월 독립기념관의 '독일어 신문 한국관계기사집'을 발간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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