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포퓰리즘 연정, 고속철 둘러싼 갈등 '임시봉합'

입력 2019-03-11 20:55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정, 고속철 둘러싼 갈등 '임시봉합'

콘테 총리, 최종결정 6개월 늦추는 방안 마련…"佛·EU 설득 작업"

현지언론 "'미봉책' 불과…연정 붕괴 시간문제" 전망도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알프스산맥을 관통해 이탈리아 북서부 토리노와 프랑스 동남부 리옹을 연결하는 고속철도(TAV)의 건설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으로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립정부의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이탈리아 정부가 갈등을 임시 봉합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당초 11일(현지시간) TAV 건설 지속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연정의 구성원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과 극우정당 '동맹' 사이에 접점이 도출되지 못하자 최종 결정을 6개월 늦추기로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코리에레델라세라 등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오성운동과 동맹이 손잡고 작년 6월 출범한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립정권은 TAV 건설 지속을 놓고 극한 대립을 이어가면서 최근 정부 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당의 주축을 차지하는 오성운동은 알프스산맥을 가로지르는 터널 건설을 수반하는 TAV가 환경에 재앙이 될 뿐 아니라, 비용 대비 편익 효과 분석에서도 마이너스 효과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TAV 백지화를 주장해 왔다.

오성운동 소속의 다닐로 토리넬리 교통부 장관 주도로 최근 완료한 비용 대비 편익 효과 분석에서는 TAV 완공 시 오는 2059년까지 70억 유로(약 9조원)의 적자가 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오성운동은 당초 86억 유로(약 11조원)로 책정된 공사비가 200억 유로(약 25조5천억원)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오성운동은 또한, TAV 건설 비용을 43명이 희생된 작년 8월 제노바 고가교량의 붕괴에서 극명히 드러난 이탈리아의 낙후된 교량과 도로 등 인프라 재정비에 투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산업이 발달한 북부를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동맹은 토리노와 리옹은 기존 4시간에서 2시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의 통행 시간은 기존 7시간에서 4시간으로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TAV가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트럭 등 자동차의 통행을 줄여 배출 가스도 감축할 수 있다면서 사업 계속 진행을 요구해 왔다.

동맹은 또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 비용 대비 편익 효과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사업 중단 시 이미 일부 지원금을 투입한 유럽연합(EU)과 프랑스에 거액을 배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서, TAV 건설을 놓고 두 정당이 정치적 합의 도출에 실패할 경우 이를 의회 투표나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여론은 TAV 찬성 쪽이 반대를 6대4 정도의 비율로 웃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성운동과 동맹 양측의 중재자로 나선 콘테 총리는 TAV 건설을 맡은 프랑스-이탈리아 합작회사인 TELT와 TAV의 핵심 공사인 터널 굴착을 위한 공사 입찰을 6개월 간 보류하기로 합의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벌었다.

콘테 총리는 "TELT에 서한을 보내 이탈리아가 프랑스, 유럽연합(EU)과 (TAV 건설과 관련한) 재협상을 완료할 때까지 법적, 재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공식 입찰을 보류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TELT는 EU의 보조금 지급 철회를 막기 위해 예정대로 입찰은 진행하되 향후 6개월 간 입찰 승인을 유보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TELT는 이달 말까지 TAV 건설을 위한 터널 공사 입찰을 진행하지 않으면 EU의 보조금 3억 유로(약 3천800억원)를 잃을 위기에 놓여 있다.

콘테 총리는 이탈리아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TAV 건설의 또 다른 당사자인 프랑스와 EU를 설득하기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프랑스와 EU가 이탈리아의 이런 입장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로 관측된다. TAV를 통해 서유럽과 동유럽을 고속철도망으로 연결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추진하고 있는 EU와 프랑스는 작년 6월 포퓰리즘 정부 출범 이후 TAV 건설이 지연되고 있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조속한 공사 진행을 요구해 왔다.

이탈리아 정부는 향후 6개월 동안 EU와 프랑스에 TAV 건설 철회를 설득하거나, 최소한 EU와 이탈리아, 프랑스가 40%, 35%, 25%씩 부담하기로 한 건설비용을 좀 더 공평하게 조정하는 방안을 밀어붙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탈리아 언론은 콘테 총리가 TELT와의 합의로 TAV의 최종 운명에 대한 결정을 6개월 미룬 것을 '법적인 곡예'라고 평가하면서, TAV를 놓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연정의 두 축인 오성운동과 동맹이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한 연정 와해는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고 있다.

TAV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건설, 북부의 자치권 확대 문제, 난민 문제 등 주요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해온 두 정당은 TAV를 놓고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처지라 6개월의 시한 동안 절충안에 도달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 언론 일각에서는 벌써 포퓰리즘 연정이 결국 붕괴해 오는 5월 유럽의회 선거 때 조기 총선이 함께 열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되고 있다.

조기총선이 실시될 경우 반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현재 30%의 중반까지 지지율이 수직 상승한 동맹의 승리가 점쳐진다.

작년 총선 때 33%에 육박하는 표를 얻어 최대 정당이 된 오성운동은 1년 전에 비해 지지율이 10%포인트가량 빠지며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간의 전망과는 달리, 포퓰리즘 정부의 두 실세인 루이지 디 마이오 부총리 겸 노동산업장관과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은 연정 와해 가능성을 일축했다.

오성운동 대표를 맡고 있는 디 마이오 부총리는 콘테 총리가 TAV에 대한 최종 결정을 6개월 미루는 방안을 제시한 직후 "논란이 긍정적으로 해결돼 기쁘다. 이제 다른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자.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했다.

당초 TAV 건설이 중단되면 연정을 깰 수 있음을 시사했던 동맹 당수인 살비니 부총리도 연정이 위기에 빠졌다는 세간의 시각을 부인했다.

그는 이날 발행된 일메사제로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디 마이오를 믿는다"며 이견은 극복될 수 있고, 타협점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TAV는 계속 진행될 것이며, (터널 공사) 입찰도 시작될 것"이라며 TAV가 당초 계획안에서 수정될 수는 있겠지만 백지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TAV의 계속 진행 쪽을 지지하고 있는 야당 민주당(PD)은 TAV 건설에 대한 최종 결정이 미뤄진 것은 포퓰리즘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이 주축이 된 전임 정부에서 교통부장관을 지낸 중진 의원 그라치아노 델리오는 "콘테와 살비니, 디 마이오가 이탈리아의 신용을 파괴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토리노와 리옹 간 약 235㎞를 연결하는 TAV 프로젝트는 당초 약 20년 전에 처음 구상됐으나, 알프스를 관통하는 약 57㎞의 터널 굴착에 극렬히 저항하는 환경단체의 반대, 경제성 논란 등에 부딪혀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작년 3월까지 집권한 전임 민주당 정부 시절에 공사가 본격화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5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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