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내가 살해돼도 특명다하라'"…112년전 헤이그특사 인터뷰
1907년 7월 로이터통신 인터뷰 실은 獨신문 보도 첫 공개
獨신문 "특사단, 밤마다 주권보장 논의…특명 실행"
특사 "고종 강제퇴위는 일본 돈과 한국 변절자가 만든 것"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에서는 "황제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했다.
일본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특사단에 결연한 의지를 전달한 것이다.
일본의 방해 속에서 특사단이 만국평화회의의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외교전을 펼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위종과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 7월 24일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외교전을 펼치기 위해 떠났다. 이준은 그 전에 같은 달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헤이그 특사단은 미국행 배에 오르기 전 로이터 통신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당시 독일 일간지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를 실으면서 '대한제국 대표사절단'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1907년 7월 25일자다.
독립기념관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 Heyryun KOH)에 연구 의뢰해 지난해 12월 발간된 '독일어 신문 한국관계기사집'의 내용이다.
고종의 구체적인 전언이 포함된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합뉴스가 고혜련 교수를 통해 입수한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사 내용은 사실상 이위종의 인터뷰였다.
이위종은 당시 다른 기사와 마찬가지로 '왕자'로 표현됐다.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외국 생활을 하면서 영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이런 이유로 헤이그 특사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기사에는 "대표사절단이 사우샘프턴에서 미국으로의 항해를 시작했다"고 돼 있었다.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이위종 왕자는 미국에 가서 일본의 한국탄압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리고 나서 몇 주 후에 런던으로 돌아와 런던에 회사를 차리고, 대한제국에서 펼치는 일본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또, "헤이그에서 그들의 임무가 실패했더라도, 그들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특히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대표사절단은 한국의 상황에 깊은 동정심을 표했고 도움을 줄 것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한국대표사절단은 강제 퇴위 된 고종이 보냈으며 대표사절단의 특명은 실행됐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고 교수는 "헤이그 특사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 못해 실패했다는 게 일반적인 역사 인식이지만,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의 외교·군사적인 지원을 받기 힘들었던 상황에서 회담장 앞 국제주의자들이 상주하던 공간(프린세시넨그라흐트 6A번지)에서 '살롱 외교'를 통해 상당한 홍보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특사단의 특명 활동에 대해 "그들은 (헤이그 살롱에서) 밤마다 대한제국을 네덜란드와 같은 중립국을 만들고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며 논의를 일으켰다"면서 "인터뷰 말미에 대표단은,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돈과 한국인 변절자들이 만든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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