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쓰지만 나으려면 꼭 먹어야 하는 약 같은 영화죠"
20일 개봉하는 '우상'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정치인 역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시나리오를 덮었을 때,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죠."
지난 8일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한석규(55)는 자연스럽게 영화 '우상'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우상'(이수진 감독)은 한 사건에 얽힌 세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달 20일 개봉을 앞뒀다.
"2017년 여름에 시나리오를 읽었죠.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정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글이었어요. '초록물고기'는 시나리오만 봐도 영화를 본 것처럼 글의 완성도가 높거든요. 이 작품도 한 문장 한 문장이 치밀했고,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도 완성도가 있었죠. 특히 라스트신이 확 각인될 정도로 강력했죠. 그때 내 몸을 통해 이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석규는 '우상'에서 차기 도지사 유력 후보인 도의원 구명회 역을 맡았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낸 뒤 피해자를 유기한 사실을 알고 단순 교통사고로 위장해 자수시킨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뒤를 쫓는다.
한석규는 최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본 뒤 '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극영화는 해야 할 이야기,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테마가 있어야 해요. 그 테마를 사랑, 웃음, 고통 등으로 전하는 것이죠. 이 작품은 마치 쓰디쓴 약 같았어요. 많이 쓰긴 하지만, 낫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약이죠."
구명회는 정치적 야망 때문에 거듭 잘못된 선택을 하고, 수렁에 빠진다. 한석규는 "예전부터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비겁한 역할을 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구명회가 한순간이라도 괜찮은 '반응'을 했다면, 폭주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다소 비현실적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결국 가짜를 통해 진짜를 이야기하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연기 경력 28년 차인 한석규는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했다가 이듬해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드라마 '서울의 달'을 시작으로 영화 '초록물고기', '넘버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텔미썸딩' 등을 거치며 1990년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이후 한동안 공백기와 슬럼프를 겪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TV와 영화에서 다시 맹활약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젊었을 때는 제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감도 있었고, 연기자로서 맹렬하게 다할 것 같았죠. 그러다 마흔 살에 건강도 덜커덕하고, 자신감도 없어졌죠. 내가 연기를 왜 하나 그런 생각에 휩싸였던 적이 있죠. 연기라는 것이 하찮게 느껴지고 지치기도 했어요. 뭔가에 혹한 것이죠. 그러다가 나이 쉰이 되니까 '아,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구나' 하면서 초심이 생각났죠."
한석규는 16살 때 가수 윤복희가 출연했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을 본 뒤 전율을 느꼈고 연기자를 처음 꿈꿨다고 했다.
그는 "당시 느꼈던 전율은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면서도 "무언가를 보고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다는 것은 곧 반응하는 일이며,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곧 어떻게 사느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도 일종의 반응(리액션)"이라며 "예전에는 상대방 연기를 보는 척, 듣는 척했다면 지금은 '정확히 보고, 듣고, 리액션하자'를 주문처럼 외운다"고 강조했다.
한석규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초록물고기' 이창동 감독을 비롯해 '넘버 쓰리'의 송능한, '접속' 장윤현, '프리즌' 나현 감독이 모두 신인이었다. '우상' 역시 '한공주'로 장편 데뷔한 이수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그는 "신인 감독들은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며 "이수진 감독도 촬영 중에 5㎏ 정도가 빠질 만큼 모든 것을 다 걸고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농사꾼과 마찬가지예요.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는 일, 거기까지가 우리 역할이죠."
한석규는 한국영화에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젊었을 때 제가 '뉴 코리안 시네마'를 이야기했어요. 새로운 한국영화를 꿈꾸고 맹렬하게 연기했죠. 자본, 투자, 제작자 모든 것이 급변하던 때가 1990년대였어요. 1998년에는 멀티플렉스도 생겼죠. 제가 꿈꿨던 새로운 한국영화를 하기에 좋은 시기였고, 거기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았죠. 2000년대 들어서는 상장 열풍이 부는 등 또다시 환경이 바뀌었죠. 최근에 생각해보니 지금도 새로운 한국영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상'은 그런 면에서 새로운 한국영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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