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가 김호득 "진정한 고수는 솜씨를 죽인다"
퇴임 후 3년간 여주 작업실서 몰두한 수묵화 작업, 학고재 전시
"춤추듯이 그린다…내 작업의 튀김과 서양식 흩뿌림 달라"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물이 흐르는 것이라고 해도 좋고, 하늘을 지나는 바람 흔적이라고 해도 좋고……."
그림 앞에 선 노작가는 어떻게 해석하든 무에 그리 대수냐 하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러다가도 "젊은 사람들이 선 몇 개 쉽게 그을 수도 있겠지만, 쉽지가 않다. 이게 휙휙, 지가 막 날아가거든"이라면서 작업 고충을 슬쩍 토로했다.
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막한 수묵화가 김호득(68) 개인전 들머리에는 대작 '흐름'이 놓였다.
세로 1.6m, 가로 2.5m 광목천을 바닥에 깔아놓고, 머리가 주먹만 한 붓을 휘두른 작업이다. 굵은 검은 먹선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다가, 결국 '쨍' 하며 충돌하는 참이다. 그 기세가 얼마나 센지, 미세먼지로 가득 찬 바깥 공기를 격파라도 할 듯싶다.
이번 학고재 전시는 2015년 대학에서 정년 퇴임한 뒤 경기도 여주 산골로 들어간 작가의 지난 3년을 압축해 보여준다. 본관과 신관을 함께 쓰는 전시는 김호득 고유의 지필묵 수묵화 18점과 설치 2점으로 구성됐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혼자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점점 절제하는 방향으로 바뀌더라"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입담이 구수했다.
"처음에는 내 공간에서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자, 싶었는데 금방 뽀록나더라고. 그런 거 있잖아요, 연기자들이 처음 주연 맡으면 과도한 연기를 하듯이. 복잡하게 많이 그리다가, 점차 여백을 많이 내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계곡' '흐름' '폭포' 연작은 더 단순하면서도 자유로움과 능란함이 넘친다. 손가락을 붓 삼아 정통 산수화처럼 그려낸 '산-아득'(2018) 또한 형상은 많지만, 여백과 어우러지는 조형적 운율이 탁월하다.
작가는 이야기 끝에 "고수란 힘을 빼는 것이고, 솜씨를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라고 강조했다.
김호득 작품의 또 하나 묘미는 폭포 물줄기가 바닥에 닿을 때처럼, 먹물이 사방에 튀는 점이다. 작가는 "다른 작가들도 부럽다, 신기하다고 하는데 답은 쉽다. 그릴 때 몸이 그림과 같이 움직이면 된다"라며 꽤 뿌듯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리는 순간 춤을 추는 것이죠. 손이나 팔, 발이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러운 튀김이 나와요. 잭슨 폴록 같은 이의 작업과는 또 다릅니다. 그들은 공중에서 흩뿌리는 것이고, 우리는 먹물이 화면에 닿으면서 그러한 튀김이 생기는 것이죠."
신관 지하 2층에는 '문득-공간을 그리다'(2019)가 설치됐다.
먹물을 푼 거대한 사각형 수조 위에 21장 한지를 일렬로 걸어 놓았다. 조금씩 흔들리는 한지의 그림자를 비롯해 먹물 바다에 비친 풍경이 명상적이다. 지난해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등 여러 차례 전시에 나왔지만, 마주할 때마다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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